스즈키노의 밤, 네온사인이 쏟아지는 거리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18화

by 파랑몽상

삿포로 스즈키노의 밤, 조용한 스시집에서 마주한 세 사람의 엇갈린 감정.
서늘한 여름바람 속, 나래와 소에다, 미나코 사이의 미묘한 온도가 흔들린다.


스즈키노는 유학 온 이래 처음이었다.

형광빛 간판들이 끝없이 이어진 골목마다 취기 오른 회사원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라면', '노래방', '이자카야'라고 쓰인 붉은 네온사인들이 겹겹이 쏟아지는 사이로,

작은 달빛 하나가 간신히 걸려 있었다.

'이런 곳이 진짜 삿포로의 밤일까…'

나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익숙한 후카가와와는 너무도 다른 공기였다.

후카가와는 시골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돼. 복잡하긴 하지만 괜찮아.

조용한 가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소에다의 말에 따라 골목 하나를 더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네온사인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어둑한 가로등 불빛 아래 오래된 간판 하나가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문 앞의 작은 등불과 손글씨로 써놓은 '오늘의 추천 초밥' 안내판.

바깥의 북적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안쪽은 고요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초밥집

은은한 조명이 나무 향과 어우러진 초밥집 내부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카운터 너머에서는 베테랑 장인의 숙련된 칼질이 리듬감 있게 이어졌고,

정갈하게 놓인 접시들이 작은 예술품처럼 빛났다.

한국에서도 이런 고급스러운 초밥집은 가본 적이 없던 나래는 눈을 반짝였다.

소에다는 나래에게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자리로 안내했다.

"나래, 뭘 좋아해?"

부드러운 소에다의 시선과 마주치자 나래는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

"음... 저는 뭐든 잘 먹어요. 그중에서도 연어를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

오늘은 선생님이 추천해 주시는 걸로 먹을게요! 미나코짱은?"

"연어를 좋아한다면 살짝 숯불에 구운 연어 초밥은 어때?

기름이 적당히 녹아서 입안에서 사르르 퍼지거든. 먹어본 적 있어?"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없어요! 구운 연어 초밥이라니... 빨리 먹고 싶어요! 미나코 짱은요?"

아까부터 말이 없던 미나코는 사뭇 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생맥주부터 주문하고 시작할까?"

미나코는 삿포로 생맥주를 주문했다.

"나래는 음료 뭐 마실 거야? 일본은 대부분 음료를 먼저 주문해."

나래는 메뉴판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 전 술을 못하니까 그냥 우롱차를 마실게요."

소에다는 손을 들어 생맥주 하나에 우롱차 두 개를 주문했다.


미묘해지는 분위기

미나코는 소에다와 나래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자신도 모르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질투심과 서운함 그리고 자신이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대화에 끼어들려 해도,소에다의 시선은 오롯이 나래만을 향해 있었다.

말을 걸어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속상함만 점점 쌓여갔다.

미나코는 둘의 다정한 표정을 보면서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차갑게 식혀서 나온 생맥주만이 그녀의 위안이 되어주었다.

"나래! 초밥은 젓가락보다 손으로 먹는 게 더 편할 거야."

소에다는 직접 시연하며 설명했다.

"그리고 밥에 간장을 묻히는 것이 아니라 회에

간장을 찍어서 먹어야 짜지 않게 먹을 수 있어."

나래는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소에다가 알려준 대로 초밥을 먹었다.

역시나 소에다가 가르쳐준 대로 하자 초밥은 짜지도 않고 회 자체의 신선함과 향이 묻어났다.

나래는 눈을 반짝이며 소에다의 설명에 더 집중했다.

초밥 하나하나의 이름부터 계절별 생선의 특징, 부위별 맛의 차이까지 세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순간 나래는 옆에 말없이 앉아있던 미나코가 신경이 쓰였다.

"미나코 짱~ 내가 미나코짱을 엄청 부러워 하는거 알지?

미나코짱은 정말 멋있어. 시원하게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여자가

내 눈에는 진짜 멋있어 보이거든. 나는 왜 이렇게 술을 못 마시는 걸까?"

나래는 진심으로 어른스럽고 당당한 미나코가 부러웠다. 언제 어디서든

우아함을 잃지 않고 고고한 학과 같은 미나코가 나래에게는 롤모델이었다.

미나코는 나래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걸 부러워하면 안 되지... 이렇게 자상하게 챙겨주는 의사 선생님이 있는데..."

말끝을 흐리며 미나코는 다시 맥주잔을 기울였다.

운전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소에다와 달리,

미나코는 계속 술만 마실 뿐 초밥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점점 말수도 줄어들었다.

그런 미나코를 보며 나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실수했나? 소에다 선생님과 둘이서만 너무 즐겁게 대화했나...'

미나코의 표정을 살펴보니 술에 약간 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나래가 슬쩍 자리를 뜨려 하자 소에다가 말했다.

"화장실 위치를 아는데, 같이 가줄까?"

"선생님, 저 어린아이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미나코 짱이랑 이야기하고 계세요."

나래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나코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한 건 아닐까?'


술 취한 김에 나온 진심

미나코는 소에다와 둘만 있게 되자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선생님... 혹시 나래 좋아하세요?"

미나코는 술 취한 김에 용기를 내어 소에다에게 물어보았다.

이미 목소리에는 취기가 가득했지만 정신까지 취한 것은 아니었다.

소에다는 답을 하지 않고 연한 브라운 색이 되어 있는 우롱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

"제가 고백했을 때는 일언지하 거절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래는 뭐가 그렇게 특별한가요? 유학생이라서요? 아니면 나이가 어려서요?"

소에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미나코에게 몸을 천천히 돌렸다.

"나래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유를 아직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찾아가고 있는 중이고 아마 발견 못할 수도 있겠죠.

오다가와 씨의 고백을 거절한 이유는 확실히 말할수 있습니다.

중앙병원 원장님 처제라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게 거절했던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소에다는 덤덤히 말하고 얼음이 녹을 대로 녹아

이제 우롱차 빛도 남아 있지 않는 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미나코는 그런 소에다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직원을 불러 다시 생맥주를 시켰다.


어긋나는 마음들

화장실에서 돌아온 나래에게 미나코가 사케 한 잔을 따라주었다.

"나래는 술이 약하지만 일본술 한 잔 정도는 괜찮지?"

나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잔을 받았다.

따뜻한 사케가 목을 부드럽게 넘어갔지만, 곧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래! 봐봐, 벌써 얼굴이 새빨개졌어. 정말 술에 약하다니까. 물 좀 마셔."

소에다는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나래에게 물을 건넸다.

그 순간 미나코의 표정이 굳어졌다. 술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삿포로의 밤거리

식사를 마치고 나온 삿포로의 밤거리는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시원한 바람이 어우러져 환상적이었다.

7월이지만 여전히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와!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선생님, 항상 감사합니다!"

나래는 배가 부른 듯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과장되게 인사했다.

나래는 홋카이도의 여름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미나코는 천진난만한 나래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소에다는 여전히 나래의 옆에서 그녀와 보조를 맞추며 걸었다.


쇼윈도에 비친 세 사람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래만을 바라보는 소에다,

그런 소에다의 시선을 애타게 쫓는 미나코,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신경 쓰이는 나래.

삿포로의 시원한 밤바람이

세 사람의 복잡한 마음을 어디로 데리고 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작가의 말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내 인생을 다시 천천히 뒤돌아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요즘 저는 유학 시절의 나를 자주 떠올립니다.
그때,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그런 상상을 자주 하게 되네요.

그리고 문득, 글을 쓰는 시간이
예전보다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머릿속에 자꾸만 잡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서
오히려 손이 멈칫하게 되는 날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한 줄씩 써내려갈 수 있는 오늘이 참 고맙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감정의 저항, 그리고 흐르는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