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19
타카하시가 추천해 준 The Blue Hearts의 Super Best 앨범을, 나래는 근처 중고 CD 가게에서 샀다.
그날 이후로, 방 안이 조용하면 오히려 허전했다.
스피커에서는 「キス してほしい(키스시테 호시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스키한 보컬, 날이 선 듯한 기타 리프, 그리고 가사 속 짧고 치명적인 고백.
얌전하고 신중한 타카하시 군에게 이런 록 밴드 취향이 있다는 게 조금 낯설고도 묘하게 설레었다.
처음에는 분명, 발라드나 재즈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었다. 적어도 이런 거친 밴드는 아닐 거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밴드의 소란스러움과 껄끄러운 음색, 그리고 가끔은 진심보다 더 진심 같은 기타의 울림이
나래의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끔은 노랫말보다 리프가 더 마음에 와닿아, 혼자 방 안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처음엔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밴드, 정말 좋다.'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아, 나래는 순정만화 같은 타카하시 군의 얼굴을 떠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오늘은 어떤 하루였어요?"
"좋아하는 음식은 뭐예요?"
"왜 홋카이도에 오게 되었어요?"
소개팅 이후, 타카하시 군은 하루에도 몇 번씩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래는 매번 정성스럽게 답장을 보냈지만, 전화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둘 다 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자정 무렵에야 간단한 안부만 주고받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저녁. 혼자 조용히 쉬고 있던 그 시간, 전화벨이 울렸다.
"타카하시입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소파에 기대어 있던 나래는 반사적으로 몸을 세웠다.
소개팅 자리에서 들었던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 톤이 그대로였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혹시... 다음 주 목요일에 시간이 되신다면, 아사히카와에 영화 보러 가지 않으실래요?"
그 순간, 나래는 숨을 삼켰다. 쯔보하찌 점장님께 사정을 말하면 하루쯤은 쉴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몇 주간 쉴 틈도 없이 일했으니까.
"내일 점장님께 여쭤볼게요. 아마 괜찮을 거예요. 요즘 쉬지 않고 계속 일했으니까요."
말이 쏟아지듯 나왔다.
타카하시 군은 아마 수화기 너머에서 조용히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목요일 4시쯤, 후카가와 역에서 뵐게요."
"네, 그 시간이면 수업 끝나 있을 거예요."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래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꼭 쥐고 있었다.
정식 데이트다.
곧장 침대로 뛰어들어 발을 동동 굴렀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였다.
후카가와 역은 조용한 시골의 소박한 역이다.
아사히카와까지는 특급으로 약 20분 거리. 미나코와 함께 몇 번 쇼핑을 다녀온 적도 있는 익숙한 곳이었다.
아사히카와 방면 승강장에서 타카하시 군이 나래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타카하시 군은 해골 프린팅이 있는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라글란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얀 니트를 입었던 첫 만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늘의 그는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더 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에~타카하시 군, 내가 2주 전에 만난 사람 맞죠?"
나래가 장난스럽게 다가가자, 그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어색한가요? 원래 이런 스타일을 좋아해서요."
그제야 나래는 왜 그가 록 밴드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2주 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나래가 손을 내밀었고, 타카하시 군은 그녀의 손을 한참이나 잡고 있었다.
"저기... 너무 격한 환영인데요? 제가 손이 남자 같아서 악수 길게 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깜짝 놀란 듯, 그는 얼른 손을 놓았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너무나 반가워서…"
저 멀리서 라일락 특급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웅장한 기차가 플랫폼으로 다가왔다.
타카하시 군은 나래의 팔을 잡고 조심스럽게 노란 선 안으로 끌어당겼다.
나래는 살짝 중심을 잃고, 그의 팔에 몸이 기댔다.
"미안해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열차 안은 조용했고, 나래는 무릎을 꼭 붙이고 앉았다. 짧은 스커트가 괜히 신경 쓰였다.
"5시 30분에 시작하는 영화가 있더라고요. 영화관까지 걸어서 10분 정도니까 천천히 가도 될 것 같아요."
그는 미리 영화의 상영 시간을 조사한 듯했다.
"저 일본에 유학 와서 영화관에 가는 거 처음이에요. 정말 기대돼요! 영화 제목이 뭐예요?"
나래의 질문에, 그는 가방에서 팸플릿을 꺼냈다.
"아마 자막이 일본어라서 영화 보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팸플릿을 펼쳐 보니, 거기엔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떡 하니 서 있었다.
로맨스를 기대했지만, SF 액션 영화였다.
나래는 굳어진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타카하시 군도 그걸 눈치챘다.
"혹시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에요?"
"저는 오늘 왜 로맨스 영화를 기대했을까요… 아널드 나오는 영화일 줄은 몰랐어요."
그는 또다시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나래가 기대했던 데이트는 조금씩 방향을 잃고 있었다.
'소에다 선생님이었다면…'
나래의 머릿속엔 자꾸 그 사람이 떠올랐다.
플랫폼을 빠져나오며, 둘은 나란히 걸었다.
도시의 분주함 속에서 그들의 걸음은 조금 어색했고, 그 사이엔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나래는 그 침묵이 오히려 좋았다.
섣불리 다가가는 감정이 더 위험하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나래는 영화관에서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일본어 자막,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타카하시 군과의 거리.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래는 깨달았다.
자신은 아직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첫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영화 어땠어요? 역시 나래씨의 취향은 아니었나요?"
"자막 읽기에 바빠서요… 저 일본어 잘하려면 아직도 멀었나 봐요."
"에이~ 이미 충분히 잘하시잖아요."
그의 웃음에 나래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거리에는 네온사인이 쏟아졌고, 젊은이들로 붐볐다.
그 반짝임 속에서 나래는 조용히 마음을 정했다.
"타카하시 군, 오늘 영화 보러 와줘서 고마워요. 데이트 신청해 준 것도요."
숨을 고르고, 나래는 진심을 꺼냈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타카하시 군이 제일 잘생겼다고 하면 믿어줄 거예요? 내가 타카하시 군 만나고 온 날 너무 떨려서 잠도 잘 못 잘 정도였어요. 제가 너무나 앞서서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제 마음을 미리 말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아서요. 음…. 그러니깐……. 우리는 사는 곳이 멀기도 하고, 나는 유학생이라서 아직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조심스럽고... 뭐, 타카하시 군이 나를 사귀고 싶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만 타카하시 군이 나에게 너무 소중한 추억을 줘서 너무나 고마워요."
이것은 고백이 아닌, 작별이었다.
나래는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악수를 위해서.
그는 조용히 손을 잡았다. 이번엔 짧고 가볍게.
"이해해요. 제가 항상 이렇게 서투르거든요. 충분히 나래씨의 마음 이해해요
. 나래씨, 저야말로 오늘 같이 영화 봐줘서 고마워요.
저는 밥을 먹고 집에 갈 계획이었으니 혼자서 밥을 먹고 갈게요.
혹시 삿포로 오실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요."
그의 목소리엔 아쉬움과 함께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도 나래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반짝이는 식당가 쪽으로 사라졌고,
나래는 그의 뒷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리움이 아닌, 짧은 인연에 대한 정중한 마침표였다.
아사히카와 역의 라이트가 눈부셨다.
역명 간판이 밤하늘에 또렷이 떠 있었다.
나래는 가방 끈을 고쳐 메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후카가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했다.
작가의 말: 더운 여름, 모두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되면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그 와중에 소중한 베프들과 함께 망준한을 다녀왔습니다.
친구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내가 왜 이 소설을 써야 하는지 그 이유가 조금 더 분명해졌어요.
결국, 제 꿈을 이루는 길은 제 힘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하루하루, 꿈에 가까워지고 있는
파랑몽상이 되겠습니다.
꾸준함을 잃지 않도록
여러분의 응원,
오늘도 간절히 기다립니다.
– 파랑몽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