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20화
"오늘도 이자카야 아르바이트 가지?"
수업을 마치고 나래에게 다가온 오오쿠미는 가방을 정리하며 물었다.
나래는 순간 눈치를 살폈다.
타카하시와의 소개팅을 주선해 준 그녀였기에, 잘되지 못한 만남이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 있었다.
"네, 4시 반부터 11시까지요. 그런데 오오쿠미 씨…"
나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타카하시 군한테 얘기 들으셨어요? 우리, 그냥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어요. 뭔가 결이 조금 다르더라고요."
오오쿠미는 허허 웃으며 나래의 어깨를 툭 치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응, 들었어. 근데 나래, 타카하시가 생각보다 좀 진하지? 소개팅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
너도 하드록 스타일은 아니구나?"
나래는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쿠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그 속에 담긴 배려는 따뜻했다.
"괜찮아. 나랑 타카하시는 여전히 잘 지내. 그러니까 전혀 미안해하지 마."
그 한마디에 나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돌 하나를 내려놓았다.
자전거 안장에 몸을 맡기고 페달을 밟았다.
집까지는 고작 5분.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계절의 속살이 고스란히 피부로 스며들었다.
7월의 마지막 주.
곧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그 끝엔 여름방학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일상 회화는 제법 자연스러워졌지만, 전공 서적 속 한자들은 여전히 낯설고 어려웠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밤이면, 습관처럼 책상에 앉아 전공 서적의 낯선 단어들과 싸워야 했다.
페달을 힘차게 밟자 꽃향기 섞인 바람이 뺨을 스쳤다.
홋카이도의 공기는 습기 하나 없이 건조하고 시원했다.
자전거 옆으로 흐르는 개천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래는 문득,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 어디선가 익숙한 듯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영어였다.
‘이 조용한 동네에서 영어라니?’
옆집 문 앞에는 ‘CANADA POST’라고 적힌 박스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고,
곧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금발, 건강한 체격, 햇살에 그을린 피부, 그리고 환한 미소.
한눈에 봐도 서양인이었다.
"곤니찌와!"
어색하지만 정성스러운 일본어 인사.
그녀는 이삿짐을 나르다 나래를 발견하자 두 팔을 흔들며 다가왔다.
나래는 당황했지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는 안드레아야. 캐나다에서 왔어. 캐나다, 알지?"
영어라니... 일본어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는데... 6년간 배운 영어 중에서
순간 생각나는 단어가 한마디도 없었다. 습관적으로
"Hi, I'm Narae. I'm from korea"
가 다였다.
"Korea', 'North Korea?"
안드레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No, no"
나래는 당황해서 팔을 허공에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나래는 머릿속에서 일본어를 영어로 필터를 갈아 끼우는데 시간이 걸렸다.
"Oh! My god!! 여기 사람들 영어가 많이 서툴러.
그런데 너는 그래도 영어가 조금이라도 돼서 다행이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내 일본어는 진짜 끔찍하거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세상에, 네가 옆집이라니! 이건 진짜 운명인 것 같아. 잘 부탁해, 나래!"
안드레아는 나래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나래는 순간 당황했지만, 본능처럼 그녀의 품에 안겼다.
안드레아는 후카가와시와 캐나다의 국제교류 프로그램으로
1년간 연수를 오게 된 거라고 했다.
그날, 나래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예측 불가능한 이웃이 생겼다.
안드레아의 밝고 거침없는 에너지는 강력했다.
일본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솔직한 리액션과 거리감 없는 말투.
그녀는 파스텔 톤 일상 속에 떨어진 선명한 색깔 같았다.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하고 즐거운 존재.
‘나랑 비슷한 점이… 있을지도 몰라.’
"저도 잘 부탁드려요."
나래는 수줍게 웃으며 화답했다.
방 안에 들어온 뒤에도, 나래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또 다른 낯선 이와 친구가 된다는 것.
그건 생각보다 훨씬 설레는 일이었다.
서랍을 열고 한국에서 가져온 낡은 영어사전을 꺼냈다.
내일 안드레아와 나눌 대화를 상상하며, 나래는 조심스럽게 메모지를 펼쳤다.
그녀의 하루는 그렇게, 새로운 인연과 함께 조금 더 풍성해지고 있었다.
더워도 너무나 더운 여름, 잘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 회차에 등장한 '안드레아'는
제가 유학 시절 실제로 옆집에 살았던 캐나다 친구를 떠올리며 쓴 인물이에요.
1년 동안 함께 살았고, 서로의 언어는 엉망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잘 통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마음의 온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디 이 이야기가 브런치에서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과도
가만히 마음이 닿는 인연이 되길 바랍니다.
조용히, 소망해 봅니다.
늘 감사합니다.
– 파랑몽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