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는 원래, '죄송합니다'가 입에 붙은 아이였다.
남의 눈치를 먼저 보는 성격 탓에, 부탁하는 말보다 사과하는 말이 훨씬 익숙했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부탁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단지 집을 옮기고 싶다는 말 한 마디였지만, 나래에게는 너무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교무실 앞에 선 나래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손바닥에 땀이 촉촉하게 맺혔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오키 씨..."
문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불러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래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다시 시도했다.
"나오키 씨... 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교무실 안의 모든 시선이 순식간에 그녀를 향했다. 얼굴이 붉어졌고, 손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공을 떠돌았다.
가방 끈을 꽉 움켜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나래 씨,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이죠?"
나오키 과장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래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책상 앞에 서자, 다른 선생님들의 시선이 여전히 따가웠다.
"저... 과장님. 부탁이 있어서요."
"어렵게 생각 말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제 저녁,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연습했던 단어들을 조심스레 떠올렸다.
한 마디 한 마디, 나래는 신중하게 꺼냈다.
"저... 어렵게 구해주신 방인 건 정말 잘 아는데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저는 그 집에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나오키 과장의 온화했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펜을 놓고 나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왜요? 정말 괜찮은 집을 어렵게 구한 건데...
혹시, 방이 너무 작아서 불편하셨나요?"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건 아니고요."
나래는 양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에 떨림이 섞였다.
"그 집이... 너무 비싸요."
"저는 2만 엔 정도 방을 부탁드렸던 것 같은데,
4만 엔은... 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말이 끝나자, 교무실 안의 분위기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키보드 소리도, 프린터 소리도 멈췄다.
나래는 자신이 그 조용한 공간에서 너무나
큰 존재가 된 것만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 2만 엔짜리 방을 원했군요."
나오키 과장은 이해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보다 조건은 훨씬 떨어질 거예요. 방도 작고, 학교와도 멀어지고요."
그는 나래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 단어씩 또박또박, 조금 느리게 발음해주었다.
"괜찮아요."
나래의 목소리에 의외의 단호함이 담겼다.
"구해주신 집은 너무 넓고, 혼자 살기엔 외로울 만큼 커요."
말끝이 살짝 떨렸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오키 과장을 바라보았다.
"그럼 일단 한 달만 더 살아보고 결정하는 건 어떨까요?"
나오키 과장의 배려 깊은 제안. 하지만 나래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다.
정중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거절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제 밤부터 준비해온 일본어가... 그 순간, 머릿속에서 모두 사라졌다.
"...저는... 그러니까요... 저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단어들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때,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된 기억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일본 유학을 결심한 건, 부모님의 뜻이 아니었다.
도쿄 어학연수 때, 그러니까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6개월짜리 단기 연수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교 은사님이
나래에게 조심스럽게 제안을 해 주셨다.
"자네, 일본어 잘하고 싶지? 일본 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니
당연한거지? 그럼 도쿄보다는 홋카이도 대학에 유학 가는 건 어때?"
그 말 한마디가 나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추천서만 있으면 장학생으로도 입학할 수 있어.
농업쪽으로 전공하면 한국에서 취업도 괜찮고."
그 말을 듣고 나래는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대학 자퇴서를 냈다.
단숨에. 부모님과 상의도 없이.
"딱 3개월치 생활비만 내줄 수 있어. 더 이상은... 미안하지만 도와줄 수 없다."
부모님의 말씀. 그건 협박도, 반대도 아닌 가장 현실적인 한계였다.
손에 쥐어진 200만 원.
비행기값, 첫 달 방세, 당분간의 생활비...
그리고 막막한 두려움까지 모두 담긴 금액이었다.
"나 정말 열심히 해볼게. 걱정하지 마. 농업도 제대로 배우고,
일본어도 완전히 익히고. 2년 동안 후회 없이 다녀올게."
이렇게, 홋카이도행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교무실로 돌아온 현실 속에서, 나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순간, 교무실의 공기가 정지했다.
나오키 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래를 바라보았고,
나래는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만 계속 쓸어 넘겼다.
귀가 뜨거웠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때—
조용히, 교무실 문이 열렸다.
"우리 학교에 유학 온 학생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낯선 목소리였다.
반백의 머리, 단정한 회색 셔츠,
넓적한 검은테 안경 너머로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눈빛.
그는 문 앞에서 상황을 파악하더니 나래를 조용히 바라보며
한 걸음 교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왠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작은 희망 하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인연이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대학 시절, 6개월간의 도쿄 어학연수. 그때는 단순히 일본어 실력을 늘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우연히 마주친 한 분이 제 인생을 바꿔놓으셨어요.
길을 걷다 마주친 그분은 놀랍게도 제가 한국에서 뵈었던 은사님이었거든요. 타쿠쇼쿠대학(도쿄) 교수님이셨는데, 알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분이셨더라고요.
"혹시 홋카이도에서 일본어 공부해 볼 생각있어?"
그 한 마디가 시작이었어요. 교수님의 추천서 덕분에 타쿠쇼쿠대학교 홋카이도 단기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거든요.
한국에서 그 교수님께 작은 도움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 작은 인연이 이렇게 큰 기회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요?
우연한 만남이 인생을 바꾼 경험, 혹시 있으신가요?
때로는 계획하지 않은 순간들이 가장 소중한 선물을 가져다주는 것 같아요. 나래처럼 용기 내어 새로운 도전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그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작은 친절이 큰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이 소설을 쓰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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