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아니야, 첫 번째 따뜻한 인연
제설차가 '띠띠띠'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나래의 심장이 고동치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손에는 땀이 차고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내가 말한 일본어 중에서 이상한 일본어가 있었을까?
내가 너무 어눌한 유학생처럼 보였겠지.'
차가운 홋카이도의 겨울바람이 창을 사납게 두드리고 지나갈 때였다.
"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교무실 문을 열고 차분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나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은색 테 안경 너머로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175cm 정도의 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백발이
인상적인 그는 바로 이 학교의 코타키 부학장이었다.
"부학장님! 어서 오세요. 두 분은 오늘 처음 만나시는 거죠?
이번에 우리 학교 환경농업과에 입학한 유학생 이나래입니다.
나래 씨, 인사해요. 여기는 우리 학교 부학장님이신 코타키 부학장님이세요."
"아! 처음 뵙겠습니다. 한국에서 유학 온 이나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래는 허둥지둥하며 부학장님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분이 이번에 우리 학교로 유학 온 학생이군요.
안녕하세요. 저는 코타키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부학장의 깐깐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나래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건넸다.
"큰 문제는 아니고, 학교에서 방을 구해뒀는데 생각보다
월세가 비싸서 다른 집을 구했으면 한다고 하네요."
나래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70% 정도였다. 그러니 더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말을 주고받고 있는 거지?
떨려 죽겠는데 부학장님까지 왜 오신 거야?
이러다가 방 못 구하는 거 아냐?'
나래의 표정은 점점 울상이 되어 갔다.
코타키 부학장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오키 과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래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아, 이런. 괜히 말했나 보다. 그냥 살걸...'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거절하는 것도,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서툰 나래였다.
멀리 제설차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 그런 일이라면 제가 한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부학장님은 화색을 띠며 나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제가 아는 분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나래가 고개를 들어보니 부학장은 이미 휴대폰을 꺼내고 있었다.
"네, 오오니시 원장님. 지금 시간 괜찮으시다면...
네, 네. 아... 네. 학교 유학생 건으로 잠시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요.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부학장님은 나래를 바라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쉽게 해결이 될 것 같아요. 나래 씨는 저와 함께 가볼 곳이 있습니다."
코타키 부학장님은 나래에게 10분 후에 대학교 정문으로 나오라는 말과 함께 교무실에서 나갔다.
제설차가 지나간 도로는 어느새 눈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러나 양쪽 길가로 1미터가 넘는 눈의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눈길 속을 달리는 차 안에서 나래는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때 커다란 한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후카가와 중앙병원? 여긴 왜 온 거지?'
"부학장님, 여긴 무슨 일로..."
"중요한 분을 만나러 왔어요. 나래 씨에게 큰 도움이 될 분입니다."
싸늘한 밖과는 달리 병원 안은 따뜻했다.
은은한 알코올 냄새와 하얀색 간호복을 입은 간호사들이 목례를 하며 복도를 지나갔다.
나래도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오오니시 원장실' 앞이었다.
부학장님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부드러운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래는 앞으로 펼쳐질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살며시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겼다.
흰머리가 적당히 섞인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품위 있는
미소를 띤 중년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그는 나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나래 쪽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저는 여기 중앙병원 원장 오오니시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유학 오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오오니시 원장님은 나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오오니시 원장님의 손을 잡은 나래는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이나래라고 합니다."
따뜻한 커피 향이 원장실을 채웠다.
오오니시 원장은 나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그 눈빛은 나래의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따뜻한 눈빛이어서
나래는 어떤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유학 올 생각을 했을까요?
다들 삿포로 홋카이도 대학은 가지만 후카가와까지 오는
유학생은 처음 봤거든요."
나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일본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래는 생각이 나는 단어를 조합해서 겨우
"아는 교수님이 소개해 주셔서요"라는 짤막한 답변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코타키 부학장님이 말했다.
"도쿄 본교에 있는 교수님이 추천을 해주신 학생입니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나래는 아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면접을 보러 온 것도 아닌데 너무나 긴장한 탓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방값이 비싸서 다른 방을 구하고 있다고요?"
나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예"라는 대답을 했다.
그런 나래가 안타까웠는지 오오니시 원장님은 말했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 마셔요. 여기에 면접 보러 온 것 아니니까 긴장하지 말고요."
나래는 그제야 오오니시 원장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사실 저도 나래 씨보다 한 살 많은 딸을 키우는 아버지입니다.
우리 딸도 지금은 도쿄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고요.
그래서 누구보다 나래 씨의 입장을 알 것 같아요."
"다행인 것은 제가 지금 후카가와 로터리 클럽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는 한국 남해에 있는
로터리 클럽과 자매 관계를 맺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래 씨, 본론으로 들어가면 우리 병원은 직원 기숙사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비어있는 기숙사가 있고요. 그러니 나래 씨가 기숙사 방이 마음에 들면
1만 엔에 방을 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떨까요?"
"그리고 제가 부탁을 하나 하자면, 남해 로터리 클럽과 교류할 때마다
한국어로 인사 정도는 하고 싶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나래씨가 저와 우리 직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신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월세는 1만 엔에 한국어 강습비는 매달 2만 엔 드리겠습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내가 일본어를 잘못 들은 걸까? 아니면 뭐지? 정말... 이런 일이 나에게???'
나래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나 혼자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혼자가 아니었어. 내 인생에서...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갑자기 환한 등불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나래가 홋카이도에서 발견한 첫 번째 등불이었다.
작가의 말
이번 5화에서 나래는 후카가와 중앙병원의 원장님과 만나게 됩니다.
사실 이 장면은 제 유학 시절, 제가 직접 만났던 첫 번째 은인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그분 덕분에 낯설고 두려웠던 홋카이도에서의 생활이 순조롭게 시작될 수 있었죠.
독자 여러분도 인생의 갈림길에서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준 은인을 만난 적 있으신가요?
앞으로 나래 역시 저만큼이나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여정을 함께해 주세요.
다정한 마음으로, 끝까지 응원해 주시면 참 기쁠 것 같아요. �
다음화:나래는 드디어 홋카이도에 정착하며, 설레고 낯선 새로운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얀 눈으로 덮인 도시에서, 그녀의 두근거림은 마치 첫사랑처럼 조심스럽고도 간절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나래의 이야기, 함께 따라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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