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 새 집, 그리고 나래의 새로운 시작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처음부터 모든 일이 나래에게 맞춰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래는 세상의 모든 신들이 그녀의 홋카이도 삶을 응원해 주고 있다고 느꼈다.
나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눈뿐이었다.
발자국 하나 남기기 아까운 설경 속에서 나래는 조심스레 갈색 웨스턴 부츠를 눈 위에 디뎠다
부츠 안으로 차가운 눈이 스며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냉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홋카이도구나.
나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홋카이도를 직시하기 시작했다.
"나래야, 우리가 짐 옮겨줄게!"
택시를 부르겠다며 정중히 사양하려던 그녀에게 활짝 웃으며 단기대학 2학년 선배들이 다가왔다.
선배라고는 하지만 나래보다는 한두 살 어렸다.
하지만 선배답게 다정하고 의젓했고, 그중에서 운전하는 선배가 있어서 나래는 어렵지 않게 병원 기숙사까지 짐을 옮길 수 있었다.
"선배님들, 오늘 이렇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짐 정리가 되고 적응되면 꼭 한번 초대할게요.
선배님들에게 한국 라면을 대접하겠습니다."
나래의 말에 선배들이 환호하듯 외쳤다.
"얏타!!!"
제2 센트럴 하우스 102호.
“한국에서 오신 이나래 씨 맞으시죠? 저는 중앙 병원 원무과의 기무라입니다.”
기숙사 앞에는 병원 관계자가 미리 나와 있었다.
악수를 건네는 그의 손을 마주 잡는 순간, 나래는 또 한 번 실감했다.
' 내가 2년간 살 기숙사에 도착했구나'
잔뜩 긴장한 채로 기숙사 계단을 올랐다.
102호실.
열쇠를 열쇠구멍에 넣는 손이 살짝 떨렸다.
‘달칵.’
문이 열리자 따뜻한 공기가 부드럽게 나래를 감쌌다.
병원장님의 배려로 미리 켜놓은 히터 덕분이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라벤더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혼자 지내기에 딱 알맞은 원룸.
욕실과 화장실, 세면대는 분리되어 있었고
작은 부엌과 세탁기 자리까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베란다 쪽 통창을 통해 겨울 햇살이 방 안 가득 쏟아졌다.
“와... 햇살이 이렇게나 들어오는구나. 정말 따뜻하다...”
나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북쪽 겨울의 맑고 찬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드디어! 내가 살 집을 찾았어.
이 방은... 정말 내 마음에 쏙 들어.’
방 안을 둘러보며, 나래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띵동! 띵동!
문 앞에는 교무과 나오키 씨가 서 있었다.
"나래 씨, 졸업생들이 학교에 기증한 가전제품이 있는데요.
혹시 새것이 아니라서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제법 괜찮은 것들이 있어서 가져와 봤어요.
밖에 트럭에 실려 있으니까 한번 나가서 보세요."
냉장고, 전자레인지, 가스레인지, 책상과 작은 테이블까지.
모든 것이 새것처럼 반짝였다.
"와!! 모두 새것처럼 보이는데요? 정말 제가 써도 되는 건가요?"
나래는 깜짝 놀라며 나오키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죠. 다들 1년 미만 사용한 것들이라서 쓸 만할 겁니다."
나래는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일본 사람들이 한국 김을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나오키 씨, 잠깐만요. 제가 드릴 것이 있어요."
나래는 커다란 이민 가방에서 깊숙이 담겨 있던 김을 꺼내 들었다.
"별거 아니지만 제 마음입니다. 정말 이렇게 많은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래는 온마음을 담아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국에서 싸 온 총각김치며 파김치, 배추김치 조금씩 다 꺼내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돌아간 뒤, 나래는 사진을 꺼내 침대 옆 작은 선반에 조심스레 놓았다.
가족사진, 친구들과의 순간들.
공간은 이내 따뜻한 정서로 채워졌다.
'여기가 이제 나만의 공간이구나...'
그날 밤, 창밖에는 조용히 눈이 내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천천히 떨어지는 눈송이는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제설차의 경고음은 이국의 겨울을 더욱 실감하게 만들었다
나래는 창밖을 한참 바라보았다. 밖은 눈이 날리고 있었지만
방안은 포근했다.
나래는 이내 피곤함을 느끼면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는 잘 해낼 수 있어. 나는 정말 복이 많아. 이렇게 스타트가 좋다니... 이나래! 너 진짜 러키 걸이야.'
다음 화 : 타쿠쇼쿠 단기 대학에서 드디어 첫 수업이 시작된다. 하지만 일본어에 대한 불안과 현실의 벽이 가볍지 않은 시련으로 다가오는데...
작가의 말
사실... 저는 홋카이도 후카가와시 타쿠쇼쿠단기 대학의 교무과에서 이런 특혜를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과분할 정도로... 그리고 일본어가 아직 미숙한 저는 어떻게 서든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사전을 찾아가며 인사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은 픽션이라고 하지만,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소설은 논픽션에 가깝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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