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길, 시작의 발자국
영화 <철도원>에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묵묵히 깃발을 들고 서 있던 주인공처럼, 나래도 지금 철도 옆에 서 있었다. 다만 그녀의 손에는 깃발 대신 작은 설렘이 들려 있을 뿐이었다.
하늘에서는 입학식을 축복하듯 솜털 같은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후드티 모자만 쓰고 눈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나래를, 끝없이 쏟아지는 눈송이가 마치 축복처럼 감쌌다. 머리 위에 살포시 앉은 눈은 아무 소리도 없이 살짝 부는 바람에 다시 어디론가 날아갔다.
홋카이도에 와서 매일 이런 동화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동화 같은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눈의 양. 하늘이 하얀 물감을 쏟아버린 듯, 세상이 순백으로 덮여 있었다.
"땡땡땡—"
철도 차단기가 내려가는 경고음이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갈랐다. 저 멀리서 호쿠도 급행열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열차가 나래 앞을 지나가는 순간, 심장이 고동쳤다.
'오늘이 입학식이구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기분.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첫 발자국
열차가 지나간 뒤, 그녀는 다시 새하얀 눈 속에 홀로 서 있었다. 발밑에 처음으로 새겨지는 발자국을 바라보며, 나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자국들이 마치 그녀의 새로운 여정을 기록하듯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갔다.
학교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정강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걷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넓은 길에는 나래와 눈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싶어 천천히 걸었고, 눈송이는 그녀의 머리와 어깨 위에 소복이 쌓였다.
드디어 눈밭 너머로 학교 간판이 보였을 때, 나래의 가슴은 더욱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어떻게 하지?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일본어도 괜찮을까?'
무엇보다 완벽하지 못한 일본어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전부 일본어로 진행될 수업을 이해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오늘 첫 수업은 친환경 농업론이구나."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강의실 문을 열었다. 넓은 강의실에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첫날이라 그런지 모두 정장을 입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헤어스타일의 남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금방 들어온 학생! 이름 순서대로 앉는 거니까 칠판에 붙어 있는 이름표 보고 자리에 앉으세요."
교수님으로 보이는 분이 손짓했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나래는 50대 이상 남성이 하는 일본어가 특히 잘 들리지 않았다. 일본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중년 남성의 일본어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추운 곳에서 갑자기 히터가 틀어진 강의실로 들어온 탓에 양볼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볼은 더 빠른 속도로 타올랐다.
"거기! 이름이 어떻게 되지?"
"에...?"
"이나래라고 합니다."
"아, 네가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구나. 나는 친환경 농업론을 담당하는 하시모토야. 잠깐만... 너는 번호가 1번이네. 이쪽으로 와서 앉아."
뜻하지 않게 나래는 가장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래를 보고 속삭이는 목소리도 있었고,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맨 앞자리, 1번. 그 옆자리에는 2번 이케다 마사히로가 앉아 있었다.
천사의 손길
하시모토 교수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강의실을 채웠지만, 책상 위 교과서의 낯선 한자들이 나래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뿌연 안개처럼 흩어졌다. 속도도 빨랐지만 모르는 단어만 계속 나오는 것 같았다.
바삐 사전 페이지를 넘겨봤지만, 한순간 알 수 없는 한자가 칠판을 가득 채우자 나래는 사전에서도 손을 떼버렸다.
'이걸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구나... 어떻게 하지?'
땀이 이마에 맺히기 시작했다. 이미 얼굴은 푹 익은 홍시가 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あのう...(저기요)"
작은 목소리가 혼란 속에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 옆자리의 이케다가 살짝 웃고 있었다. 짧은 머리에 마른 체격, 18살 다운 소년 같은 미소를 가진 아이였다.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걸었다.
"도와드릴까요?"
그는 나래의 교과서로 몸을 기울이며 연필로 한자 위에 후리가나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 아... 너무 고맙습니다."
이케다가 써준 후리가나를 보며 사전에서 단어 뜻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 교과서의 내용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정말 고마워요."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자, 이케다는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친절함에 나래는 1, 2교시 수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모든 수업이 번호 순서대로 앉게 되어, 그 이후로 이케다는 나래의 한자 선생님이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서 병원 원무과 직원 기무라 씨를 만났다.
"이나래 씨, 안녕하세요. 기숙사 생활은 어떠세요?"
"안녕하세요. 덕분에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전해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원장님께서 5월 1일 병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여시는데, 나래 씨를 초대하고 싶어 하십니다."
"정말요? 와, 바비큐 파티라니... 꼭 참석할게요!"
첫날부터 한자의 벽에 부딪쳐 제대로 해낸 것이 없는 것 같은 하루였지만, 이케다의 따뜻한 도움과 뜻밖의 초대가 작은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바비큐 파티가 있었 던 날 예상치 못한 사람으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은 그녀의 모든 계절을 바꿔놓을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다음화 예고: 5월 1일, 중앙 병원의 바비큐 파티에 초대된 나래.
그곳에서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 사람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남은, 그녀의 마음에 또 다른 파문을 남기는데…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파랑몽상입니다.
매주 월, 수, 금 소설을 올리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단어를 이어 붙이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꺼내 놓는 일이란 걸, 요즘 더 깊이 느끼고 있어요.
참, 저는 성이 ‘이’ 씨라서 실제 일본 대학에서도 출석번호 1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케다 군’은,
실제로 출석번호 2번이었던 제 옆자리 친구였어요.
그 아이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았지만,
언제나 한자나 어려운 단어를 조용히 알려주는
참 상냥하고 배려 깊은 친구였습니다.
전공 수업은 거의 대부분 이 친구 옆에서 들었고,
이렇게 소설을 쓰다 보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날의 교실과 이케다 군의 옆모습이 그리워지네요.
아마도 이게 제가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진짜 이유겠지요.
잊고 있던 마음을 꺼내고,
다시 한번 그 시절의 따뜻함을 만지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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