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별보다 반짝인 눈빛을 만났다
홋카이도의 5월은 아직 겨울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대설산, 일본어로 다이세츠잔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1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다. 나래의 눈에 저 멀리 대설산이 보였다. 자연의 웅장 함이라는 것이 이런 것임을 새삼 느꼈다.
후카가와 중앙 병원의 바비큐 파티장 주변에도 여전히 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5월이지만 차가운 바람이 몸을 파고들어 두꺼운 외투를 두르게 했다.
하지만 나래의 마음만큼은 따뜻한 봄이었다.
"소에다 쇼이치라고 합니다."
병원장님이 가리킨 곳에는 유난히 키가 크고 서양인처럼 생긴 남성이 서 있었다. 뜻밖에도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주었다.
특히 유난히 길고 하얀 손이 나래의 시선을 끌었다. 순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나래씨, 우리 병원 안과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의사 선생님이십니다. 인사하세요. 실력도 인물도 우리 병원의 에이스예요."
오오니시 원장선생님은 소에다를 부르고 나래에게 소개를 시켜주었다.
"안녕하세요! 이나래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나래는 일본어로 또박또박 답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목소리가 떨리는 걸까?
소에다는 나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 어딘가에는 묘한 다정함이 스쳐 지나갔다.
"홋카이도는 처음이신 거죠?"
그는 어색하지만 또박또박한 한국어로 물었다. 일본어 특유의 억양이 묻어났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네. 처음이에요. 그런데... 한국말을 정말 잘하시네요."
나래는 많은 일본인을 만나보았지만 한국말을 하는 일본인은 처음이었다. 물론 '안녕하세요' 정도의 한국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말이다. 나래는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한국어를 하는 소에다를 자신도 모르게 방긋 웃으며 응시했다.
"아, 아직 많이 부족해요. 실제로 이렇게 한국 사람과 대화해 보니 더 어렵네요."
소에다는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나래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해맑게 웃는 그녀의 미소에 그의 입꼬리 또한 자신도 모르게 귀까지 올라갔다.
"저 북한에도 두 번 다녀온 적 있어요. 그때 한국말을 좀 배워둘걸... 하고 후회를 한 적이 있어서 혼자서 공부를 했거든요."
"북한이요? 정말요?"
나래의 눈이 순간 반짝거렸다.
"일본인은 북한에 갈 수 있군요. 한국 사람은 북한에 절대 가면 안 되거든요. 실제로 간 북한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그래요? 잘됐다. 제가 북한에서 찍어온 사진이랑 동영상이 있는데... 다음에 시간 있을 때 저희 집에 보러 오실래요?"
뜻밖의 제안에 나래는 "네?"라고 되물었다. 자신이 잘못 알아들었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에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오오니시 원장님이 다른 의사 선생님을 소개한다며 나래를 찾았다. 소에다도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소에다와의 대화는 의외로 편안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서로를 탐색하는 듯한 긴장감도 흐르고 있었다. 소에다는 쌍꺼풀 있는 또렷한 눈과 높은 콧대, 두툼한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답지 않은 이목구비는 그의 미소를 더욱 인상 깊게 만들었다.
185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올림픽 수영 상비군 출신다운 균형 잡힌 체격, 그리고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까지. 소에다의 모든 것이 나래의 이상형에 완벽히 부합했다. 하지만 왜인지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래 씨, 일본어 정말 잘하시네요. 한국에서 원래 일본어를 잘하셨던 거죠?"
"전혀요... 한 달 전에 여기 유학 왔을 때만 해도 일본어로 대화하는 것이 힘들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절박하니까... 진짜 절박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저절로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고, 저도 모르는 순간 일본어가 자연스럽게 되더라고요."
나래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 일본어가 정말 괜찮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도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달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는 한국어 공부한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이 정도인데..."
소에다가 말끝을 흐렸다. 나래는 그런 소에다의 얼굴 표정이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일본어로 자유롭게 대화하기까지의 시간을 떠올리며 뿌듯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소에다의 솔직한 모습에 묘한 친근감이 들었다.
"역시 그 나라 말을 배우고 싶으면 그 나라로 가는 게 최고군요. 아참! 나래 씨가 병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소에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저도 한국어에 관심이 많아서... 혹시 수업에 참여해도 될까요?"
그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나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과연 잘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파티가 끝난 후, 소에다와의 갈림길에서 나래는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그와 인사를 나누려 했다.
"나래 씨, 저기~ 하늘 한번 보세요."
소에다가 나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나래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우와! 이렇게 많은 별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나래는 온통 하늘을 하얗게 뒤덮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래 옆에 서 있는 소에다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순간 나래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이런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도 확실하지 않았다.
소에다는 제3 센트럴 하우스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래와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아참! 혹시... 전화번호를 여쭤봐도 될까요?"
소에다가 조심스럽게 나래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네, 물론이죠. 제 번호는 090…"
소에다는 나래의 번호를 저장하면서 말했다.
"아프거나 고민이 있거나 술 한잔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부담 갖지 말고."
소에다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나래에게 인사를 한 후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져 갔다. 나래는 소에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래는 바비큐의 흔적과도 같은 숯 냄새를 씻어내러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앉아 소에다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혼자서 피식거렸다.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졌다.
홋카이도의 밤, 창밖으로 보이는 다이세츠잔은 여전히 하얗게 빛났다.
나래는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소에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의 미소, 어색한 한국어,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국어 수업 참여를 부탁했던 모습까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한국어에 관심이 있는 걸까?'
나래는 베개를 꽉 껴안으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설렘과 동시에 막연한 불안감도 밀려왔다.
이 낭만적인 순간은 오래도록 그녀의 기억에 남을 듯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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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사주를 보러 갔는데, 점쟁이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당신이 글을 쓰는 건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예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어요.
'정말 그런 걸까?
내가 이토록 애써 쓰는 글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면…
계속 써도 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바로 소설을 쓰고 있을 때였어요.
이야기를 만들고, 인물에게 숨을 불어넣고,
그 감정의 흐름을 따라갈 때 저는 누구보다도 나답고 살아 있음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결정했어요.
누가 알아주든 말든,
제가 저를 믿고 쓰는 이 시간만큼은 계속 가져가기로요.
늘 조용히 읽어주시는 분들,
댓글은 없지만 흔적처럼 남아있는 방문자 수 하나하나가
저에겐 큰 힘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파랑몽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