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65화
대학교의 농장도 모든 작물의 수확을 마쳤다.
초록빛으로 가득했던 잔디밭은 곧 하얀 눈 속에 파묻힐 것이다.
겨울이 성큼 다가오는 게 느껴질수록, 나래는 자꾸만 이 늦가을이 더디게 흘렀으면 했다.
멀리 보이는 다이세츠잔은 이미 하얀 눈으로 산 전체를 덮고 있었다.
눈은 조용히, 그러나 거침없이 대지를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보내는 첫 해.
나래는 새삼 깨달았다.
여름이 이토록 짧고 찬란한 계절이었다는 걸.
밤이면 창문을 열고 잠들기엔 차가울 만큼 서늘했던 그 여름을,
그녀는 지금이 되어서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계절의 변화마저 잊게 만드는 시간이 있었다.
바로 플라워 어레인지먼트 수업이었다.
강의실 문을 열자, 커다란 통에 꽂힌 꽃들이 가장 먼저 시야를 채웠다.
용담(린도우) 린도우는 깊고 고요한 푸른빛을 머금고 서 있었다.
자줏빛 점이 박힌 두견화(호토토기스)는 신비로웠고,
피소스테기아는 연보랏빛 작은 꽃잎이 포근한 기운을 풍겼다.
네리네는 꿈결 같은 분홍빛을 머금었고,
에리카는 조용한 쓸쓸함을 품고 있었다.
검은 열매가 인상적인 히오우기는 묵직한 포인트가 되어주었고,
은빛의 유카리와 단단한 하란은 전체 분위기를 차분히 다듬고 있었다.
오늘 준비된 꽃들은, 모두 깊고 조용한 가을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꽃 이름 하나 알지 못했던 나래였지만,
일 년 가까운 수업을 지나며 이제는 그 꽃들의 이름을 자연스레 기억하게 되었다.
그때, 단아한 백합을 떠올리게 하는 묘도 교수님의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렸다.
“오늘도 꽃꽂이에 어울리는 꽃들을 준비해 왔어요.
여러분의 감성에 맞는 꽃을 골라 마음껏 만들어 보세요.”
학생들은 저마다 앞으로 나아가 꽃을 집어 들었다.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대부분 사회인 과정의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
나래처럼 젊은 학생은 드물었다.
구시로 여행을 함께 했던 멤버들도 다들 이 수업을 들었다.
나래는 마음을 끄는 꽃말을 가진 꽃들을 조심스레 골랐다.
네리네 — 행복한 추억, 기적, 다시 만남
호토토기스 — 은밀한 사랑, 인내, 젊음
유칼립투스 — 드라이플라워로도 변치 않는 향기
그리고 문득, 자신이 지금
소에다와 나누고 있는 은밀한 사랑이 떠올라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나짱, 오늘 고른 꽃들… 전부 사랑 얘기잖아?”
단 루미코가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찔렀다.
“알고 있어? 요즘 너… 표정이 달라.
사랑받는 사람만 지을 수 있는 미소랄까”
나래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감추며 가볍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꽃꽂이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집에 꽃이 있으니깐 너무나 행복하더라고요.”
자리로 돌아온 나래는
플로럴 폼 위에 꽃들을 하나씩 꽂아나갔다.
오늘 만든 꽃꽂이를 소에다에게 건넬 생각을 하자,
손끝이 조심스러워지고 마음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밤 11시.
쯔보하지에서의 아르바이트를 마친 나래는 활기차게 인사했다.
“점장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도 수고했어, 나짱. 추우니까 조심해서 들어가!”
후카가와의 늦가을 밤공기는 뺨을 스칠 만큼 차가웠지만,
하늘의 별빛은 여전히 선명했다.
나래는 집에 들러 꽃꽂이한 꽃과 전공 서적이 든 가방을 챙겨
소에다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밤공기가 찼다.
나는 후드 모자 안으로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걷고 있을 때였다.
"나래?"
익숙한 목소리. 미나코였다.
"아, 미나코 짱. 이 시간에 어디 가는 거야?"
"강아지 산책. 나래는? 소에다 선생님 댁에?"
"응. 중간고사 준비 때문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어색하게 웃었다. 미나코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미나코의 표정이 읽히지 않는 문장처럼 알쏭달쏭했다.
"그렇구나. 조심해서 다녀와."
미나코가 강아지의 줄을 당기며 말했다.
"다음에 커피 마시자. 나짱, 요즘 선생님 만나느라 우리 같이 밥 먹은 지도 오래되었잖아"
미나코는 잠시 망설이다가, 밤공기에 흩어질 듯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실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선생님의 부모님이… 너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
그 말만 남기고 미나코는 별빛 아래로 사라졌다.
나래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선생님의… 부모님이 왜 나를?’
가슴 한쪽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현관 벨을 누르자,
베이지색 니트를 입은 소에다가 따뜻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어서 와. 오늘도 수고했어.”
그의 품이 나래를 감싸는 순간,
하루의 피로가 발끝으로 녹아내렸다.
하지만 나래는 꽃이 눌릴까 봐
얼른 몸을 빼며 꽃을 내밀었다.
“선생님, 이거요! 오늘 수업에서 만든 건데… 선생님 생각하면서 만들었어요.”
소에다는 꽃을 받아 들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빛 아래서 흔들리는 꽃잎을 보며 미소가 번졌다.
“정말 예쁘다. 유칼립투스 말고는 이름도 모르겠지만… 내가 받은 꽃 중에 제일 좋네.”
그는 서랍에서 꽃병을 꺼냈다.
투명하고 기다란 목을 가진 꽃병이었다.
보라색과 하얀색의 꽃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은 채,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소에다는 나래에게 따뜻한 녹차를 내왔다.
“아르바이트… 그만두면 안 될까?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는 거, 걱정돼.”
“선생님, 저 가난한 한국 유학생인 거 잊으시면 안 돼요.
게다가요, 저는 이 아르바이트가 좋아요.”
나래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한국에서는 알바 경험 하나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돈도 벌고, 사람도 배우고…
인생 공부 제대로 하고 있어요.”
그 말을 듣던 소에다는
잠시 고개를 떨구며 조용히 속내를 말했다.
“나는… 나래랑 보내는 시간이 늘 아쉬워.
요즘은 나래가 더 바쁜 것 같기도 하고.
나래가 내 옆에 꼭 있었으면 좋겠어.”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래의 가슴 한쪽이 조용히 떨렸다.
나래는 전공 서적을 보다가 조금스럽게 소에다에게 얼굴을 돌렸다.
“오는 길에… 미나코짱을 만났어요. 그런데 선생님 부모님이 저를 궁금해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소에다는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게… 아버지가 중앙 병원 원장님께 연락을 하셨더라고 나도 오늘 어머니께 문자 받고 알았어.
하지만 걱정 마, 나래.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나를 믿어.”
그 말은 따뜻했지만, 나래의 마음 어딘가에 벽을 두르는 듯했다.
묵직한 추 하나가 더 매달리는 기분이었다.
무엇을 알아서 한다는 걸까.
무엇을 믿어 달라는 걸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린 겨우 석 달 된 사이인데…
부모님 이야기가 오르기엔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나래는 창가에 놓인 자신의 꽃꽂이를 바라보았다.
‘은밀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두견화(호토토기스)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래는
소에다 쇼이치가 어떤 집안의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창밖의 다이세츠잔은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났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요 며칠 마음이 복잡해서, 글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왜 소설을 쓰고 있는지,
이 길이 정말 나에게 맞는 건지…
한동안 멀쩡하다가도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고민이
다시 문을 두드리더군요.
아침마다 알람이 울리면 자연스럽게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작가들이 있어요.
그 꾸준함이 참 부럽기도 하고,
‘저 사람들은 어떤 힘으로 매일 글을 쓸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자꾸 멈춰 서게 되는 걸까,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게 되는 시간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