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73화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요란스러운 간판이었다.
형형색색으로 그려진 피에로의 얼굴에
나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하코다테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찾는다는, 지역 한정 햄버거 프랜차이즈.
가게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진한 간장 향이 코끝 깊숙이 스며들었다.
달짝지근한 닭튀김 냄새와
감자튀김의 고소한 향이 뒤섞였다.
"이렇게 화려한 햄버거 가게는 처음이에요."
매장 안은 더욱 압권이었다.
빨강, 노랑, 파랑의 플라스틱 의자들이
제각각 다른 높이로 놓여 있고,
벽에는 8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온갖 포스터들이
시간의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질서 없는 질서, 혼돈 속의 조화.
홋카이도로 유학을 온 이래
나래에게 햄버거 하면 늘 '모스버거'였다.
토마토와 양상추의 신선함 덕분에,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름조차 생소했던 럭키 피에로는
지금까지 본 햄버거 가게 중
독특한 인테리어로는 단연 최고였다.
"시그니처 메뉴를 주문하자."
소에다는 성큼 앞으로 나가
차이니즈 치킨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다른 테이블에는
삼삼오오 고등학생들이 모여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저 나이 때가 제일 행복했다는 걸,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래가 조용히 말했다.
"나이를 한두 살만 더 먹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되더라고요."
나래의 말에 소에다가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너무 나이 많은 아저씨 된 것 같은데?
나래는 고등학교 졸업한 지 2년밖에 안 됐지만,
나는 10년도 훌쩍 넘었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소에다가
창밖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젠 직업보다도 어떤 가정을 만들까 가 더 고민이야.
그러고 보면 연령에 따라 고민도 참 다르구나."
나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이맘때쯤,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요.
한국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을지, 아니면 일본에 계속 남을지..."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이런 고민을 하는 내가 사치스러운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녀는 소에다를 바라보았고,
소에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래는 아마도..... 일본에 있지 않을까? 나래 옆에는 내가 있고...
나는 그랬으면 좋겠는데?"
추운 곳에서 따뜻한 실내로 들어온 탓인지,
나래의 양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게 기온 때문인지, 아니면 소에다의 눈빛 때문인지는
나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나래는 햄버거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닭고기를 좋아하는 것도 있었지만,
미지근한 간장 소스와 짭조름한 감자튀김의 조합은
지금 이 여행의 첫 끼니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콜라까지 한숨에 들이킨 나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햄버거는 모스버거인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
손가락까지 야무지게 빨아먹는 나래를 보며,
소에다는 절로 웃음이 났다.
"첫 번째 코스부터 이렇게 대만족이라니.
이 여행을 계획한 내가 절로 힘이 나는데?"
소에다는 엄지를 들어 보였다.
기차에서 내려 햄버거 하나 먹었을 뿐인데,
시간은 벌써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었다.
바닷바람이라서 그런지 몸에 닿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나래는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이대로 숙소로 들어가면
배불러서 가이세키를 제대로 못 먹을지도 모르니,
산책이라도 하고 들어가자."
소에다는 말없이 나래의 손을 잡아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함께 넣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마치 모든 추위를 녹여주는 듯한 마법 같았다.
하코다테 베이 에어리어는 마법 같았다.
붉은 벽돌 창고들이 늘어선 길,
파도와 태양이 만들어 낸 눈부심,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맥줏집과 와인바들.
마치 유럽의 어떤 작은 도시에
떨어진 것 같았다.
"여기, 일본 같지가 않아요.
유럽의 어느 항구 도시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 누구도 소에다와 그녀를 알아보지 않았다.
후카가와에서는 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 낯섦 속에서,
나래는 소에다에게 먼저 입을 맞출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겼다.
나래는 기차역에서 산 일회용 카메라로
연신 셔터를 눌렀다.
"선생님! 팔 길게 뻗어서 같이 찍어주세요."
그녀는 소에다의 품에 쏙 들어와,
귀여운 부엉이처럼 고개만 쏙 내밀고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에 관심이 많은 나래는
소에다에게 "만져봐요, 맡아봐요"라며
세상의 감각을 나누자고 했다.
그녀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이
소에다에게는 새롭게 보였다.
"슬슬 숙소로 들어갈까? 많이 걸어서 피곤하지?"
소에다가 물었다.
"벌써 6시가 넘었네요. 오늘은 아름다운 것들만 많이 봤더니,
힘든 줄도 몰랐어요."
나래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선생님, 다음에 또 같이 와요. 꼭이요."
나래는 그의 품에 살포시 안겼다.
그는 나래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체온이
자신의 가슴 안쪽으로 고스란히 스며들도록,
천천히 깊이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