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72
'덜컹—'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금속성 마찰음만이
거대한 철제 상자가 남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특급열차 '슈퍼 호쿠토'의 특실은
이른 아침 시간 탓인지, 아니면 11월의 비수기 때문인지 한산했다.
푹신한 벨벳 시트와 여유롭게 펼쳐진 공간이
마음까지 느긋하게 풀어놓는 듯했다.
하코다테에 가까워지자
기차선로 너머로 겨울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빛 파도가 검은 바위에 부서지며 하얀 거품을 토해냈다.
11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바다는 더욱 쓸쓸해 보였지만,
그 위를 유유히 날아다니는 갈매기들만은 자유로워 보였다.
소에다는 한시도 나래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손 안에서 가끔씩 꼼지락거리는
나래의 손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지난 5월, 처음 만났을 때 나래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제가 손이 워낙 남자 같아서,
저는 손이 예쁜 남자가 좋더라고요."
그때 소에다는 자신의 손을 내밀며 말했었다.
"저 손 예쁘다는 말 많이 들어요.
우리 손 크기 한번 재볼까요?"
둘의 손을 마주 댔을 때,
나래의 손은 예상보다 크고 두꺼웠다.
투박하면서도 정직한 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손이
자신의 손 안에서 얌전히 꼬물거리고 있다.
손이라도 잡고 있고 싶었다.
그녀가 자기 여자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듯이.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는 처음이에요.
그래서 다들 겨울 바다가 멋있다고 하는 거군요."
나래는 연신 창밖 바다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갈매기가 저렇게 낮게 날아요?
선생님은 겨울 바다에 가보신 적 있어요?"
세상 만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소에다는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밝게 볼 수 있을까.
소에다 자신은
세상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딩동댕동—'
어느새 열차 안 스피커에서 차분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곧 하코다테 역 도착이라는 신호였다.
4시간의 고요한 기차 여행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소에다는 선반에서 짐을 내리고 나래에게 손을 뻗었다.
열차에서 내리자 삿포로와는 사뭇 다른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하코다테 역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어딘지 정감이 있어 보였다.
승강장에서 바라본 역사는 단층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회색빛 건물이 더욱 차분하고 고즈넉해 보였다.
역 광장 너머로는 항구 도시 특유의
낮은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하코다테만의 푸른 바다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의 비릿한 냄새와 차가운 바람,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 같은 습한 공기가 둘 사이를 휘감았다.
11월 하코다테의 공기는
겨울을 재촉하는 듯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항구 도시만의 부드러운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점퍼 잘 잠가. 생각보다 추워."
나래는 춥지 않았다.
오랜만에 맡는 바다 냄새에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으니,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점심은 럭키 피에로에서 먹을까?
거기 햄버거가 엄청 유명하거든."
나래도 하코다테에 오기 전
여행 잡지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3시에 체크인하고,
조금 쉰 다음에 온천에 들어가면 딱 좋을 것 같아.
오늘은 첫날이니까 많이 쉬고,
내일은 여기저기 돌아다니자.
저녁에 전망대도 가고."
"럭키 피에로도 좋고, 온천도 좋고,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인 것도 좋고...
좋지 않은 게 하나도 없는데요?"
나래는 소에다의 얼굴을 보며
피에로 같은 표정을 지었다.
소에다는 완벽한 하루를 그녀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도 선택해야 했다.
나래와 계속 연인으로 지낼 것인지,
아니면...
사랑해도 헤어져야 하는지.
요즘 들어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자주 오기 시작했다.
아마 중앙병원 원장으로부터
나래의 존재가 귀에 들어간 것 같다.
어머니는 여자친구가
12살이나 어린 한국 여자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고,
이번에도 결혼을 반대할 것은 뻔했다.
소에다는 이번 여행에서
나래에게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작정이었다.
과연 자신에게 나래를 지킬 힘이 얼마나 있을까.
첫사랑과 허무하게 파혼했을 때의 무기력함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도쿄로 돌아와서 아버지 병원을 이어받으라는 말도
이젠 지겨워서 듣기 싫었지만,
결국 자신이 돌아갈 곳은 그곳이라는 걸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서른한 살이 되어서야
부모님께 반항이라도 하듯 홋카이도로 왔다.
다시는 연애 따위 하지 않겠다고,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나래를 만나버렸다.
부드럽게 택시 한 대가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이제부터 온전히 둘만의 2박 3일이 시작된다.
소에다는 나래의 손을 더 꽉 쥐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시간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래는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하코다테의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구름 사이로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