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자신에 차 있었다. 이 사람, 분명 나를 좋아하는 거야, 내가 하는 건 다 좋다잖아.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를 만날수록 강한 확신이 들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내 모습을 좋아하는 여자, 그 모습을 보며 오늘도 의심치 않고 여자를 만나러 간다.
‘작업의 정석’이라는 영화가 있다. 2005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연애 고수인 남녀가 만나 서로를 쟁취하기 위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로맨틱코미디 영화다. 벌써 20년 가까이 된 영화다 보니 요즘 연애와는 다소 질감이 다르다. 그때 당시에는 ‘썸’이라는 단어는 대중적이지 않았고, ‘밀당’이라는 단어가 더 지배적인 시대였다. 학창 시절 우연히 TV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꽤 충격을 받았다. 소설 소나기처럼 순수한 사랑을 그렸는데, 웬걸! 이들이 펼치는 엄청난 눈치 싸움을 보며 현실 세계 어른들은 이런 걸까 조금 두려웠다.
대학에 입학하고 여러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서 나의 두려움은 조금씩 설렘으로 변했다. 약간 재미도 있었다.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그 미묘함 사이에 피어나는 즐거움이란. 당시 음원 차트는 <썸>이라는 정기고, 소유의 메가 히트곡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사가 참 재밌다.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너라니. 썸을 타는 사람도, 타 본 사람도, 타고 싶은 사람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 노래의 위력은 참 대단했다.
‘썸’이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자리 잡을수록 동시에 ‘밀당’의 형태도 다채로워졌다. 각양각색의 방식이 인터넷과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될 정도였으니까. 사실 나도 슬쩍 사용해 본 것들이 있다. 다소 클래식한 나의 밀당은 이러했다. 3분 동안 답을 보내지 않고 기다리다가 3분 후에 답장하는 방식. 전화는 바로 받지 않고 3번 울릴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 요즘 MZ세대가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 그렇지만 그 당시에 3분-3분-3분은 꽤 많은 사람이 시도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3분 매직을 포함한 여럿 ‘잔기술’을 펼치며 조금씩 기울어지는 상대방의 마음을 느끼고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두근거리는 마음과 설렘에 취해있었다.
오늘 소개할 <잊을 수 없어>는 그때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이 곡은 그녀와의 관계를 확신하는 남자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노래다. 본격적으로 가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아티스트와 곡 소개를 조금 하자면 9001(Ninety O One)은 신한카드 루키 프로젝트에서 금상을 수상한 주목받는 신예 밴드다. 사실 밴드 음악 하면 ‘록’ 음악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들은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다. R&B, 아이돌, 인디 등등 사운드에 트렌디함과 장르 간의 융합을 시도하며 ‘요즘 밴드’가 점점 진화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일단 보컬 자체가 ‘록’보다는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굵지 않은 톤이니 듣는 사람 입장에서 그 가벼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잊을 수 없어> 곡을 들어보면 많은 구간에서 다양한 화음을 들을 수 있다. 층층이 쌓아 올린 화음을 들으며 R&B 음악 같기도 했고, 가성과 진성을 넘나들며 애드리브도 굉장히 많아서 내 귀가 살짝 간지럽기도 했다.
이제 가사 이야기를 좀 해보면,
‘잊을 수 없어’
‘내일도 보고 싶을걸’
참 대단한 자신감이다. 넘치는 자신감이 이 남자의 매력인가. 가사를 쭉 들어보니 그럴 만도 하다. 남자의 행동에 여자는 한결같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남자는 점점 확신에 차고 벗어날 수도, 잊을 수도 없다고 하는 거겠지. 그런데 이 남자 혹시 알고 있을까. 진정한 고수는 ‘밀당’이 아니라 ‘당밀’을 한다는 것을.
남자가 자신감을 느끼게 된 것은 사실 이 관계에 ‘확신’ 하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 보면 지금 관계에 ‘확신’을 가지게 된 건 그녀의 행동 때문이다. 별 생각이 없이 한 행동에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고 ‘너에게 관심 있어’라는 티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이 싫지 않았는지 남자는 살짝 바뀐 화장도 눈치채고, 45도 각도에서 보는 여자의 모습을 예쁘다고 느낀다. 이 부분에서 남자도 그녀에게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첫 문단에 ‘확신’에 찬 남자의 마음을 말했다면 이제 그녀의 마음을 말할 차례겠다. 그녀는 이 관계의 행복한 결말을 꿈꾸고 있겠지. 어떻게 해야 하나 엄청난 고민을 했을 거고, 친구들에게 고민 상담도 했을걸. 과하지 않게 조금씩 당기면서 다가오게 만들 거야. 그리고 남자에게 묻겠지. 우리 관계의 결말을.
노래를 듣는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자신감 넘치는 남자의 태도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 멋대로 해석한 여자의 마음도 어떤 결말에 닿을지는 모른다. 그럼 뭐 어때, 이미 서로가 좋아하는 걸 나는 알겠는데. 그렇게 남자의 마음과 여자의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 연인이 되는 거겠지. 갑자기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오네. 이 노래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