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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웨 Mar 27. 2024

"우리 이름은 준서입니다"

--두 준서의 이야기 


나는 준서입니다. 


엄마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렸을 때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한국인이신 아빠의 직장 때문에 미국 시골에서 살게 되었고, 나는 초등학교 생활을 거기서 보냈습니다. 비록 엄마의 한국어 발음이 조금 다르지만,미국에서 살다 보니 별로 의식하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도 아빠나 엄마나 나나 다 영어를 조금만 할 줄 아는 동양 사람들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다르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미국에서 살다가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와 나는 모두 한국어가 조금 서툴러서, 내가 학교 공부 끝나고 집에 오면 엄마는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다시 나에게 설명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또 한국어를 공부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바쁘게 한국 학교생활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중국어를 배울 여유도 없고, 엄마가 중국 사람인 걸 의식하지 않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 cdc, 출처 Unsplash


내가 엄마가 중국인이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여름 방학 때 엄마를 따라 중국에 다녀왔을 때부터이었습니다. 아빠가 일로 바쁘셔서 엄마는 나만 데리고 엄마의 고양 쓰촨성에 갔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엄마의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모두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알아듣지 못한 말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중에 “니하오, 짜이 지엔” 밖에 알아듣지 못한 나는 엄마의 지시를 따라 인사했습니다. 조용한 서울에서 살다가 갑자기 요란하게 대화하는 시골에 와서, 온종일 머리가 어지럽고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 있을 때와 달리 엄마는 완전히 수다쟁이가 되었습니다. 엄마는 친척을 만나든 친구를 만나든지 눈에서 본 적이 없는 빛이 나면서 대화 중에 수없이 하하 웃고 매우 즐기는 모양이었습니다. 엄마와 여행하는 것은 좋지만, 언어와 음식, 그리고 어디에 가든 밀려오는 인파는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 중국에는 아직 고속열차가 없어서 우리는 10시간 이상 기차를 타고 또 몇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 해야 했습니다.



                                                                  © colnago, 출처 Unsplash


나는 이후 한국에서 솔직히 다른 한국 아이들과 별 차이 없이 자랐습니다. 제2외국어를 고를 때도 일본어를 선택해서 배웠습니다. 물론 일본어가 공부하기가 편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 마음속에서는 다른 친구가 내가 다문화 자녀인 것을 모르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다문화 친구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많은 것에 반면, 나는 외모도 그렇고 크게 고민을 안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을 한국 사람으로 생각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것 같습니다.






나도 준서입니다. 


우리 엄마는 러시아 사람입니다. 나는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4~5살 때 한국으로 왔습니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엄마가 다른 친구 엄마와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 엄마는 푸른 눈과 진한 쌍꺼풀이 있고 머리가락도 노란색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나에게 얘기할 때는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도 점점 느끼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나는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생긴 얼굴 때문에 자신감이 좀 없어졌습니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그런데 신기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누나들이 하굣길에 항상 나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귀여워요, 정말 잘 생겼어요.” 말하면서 나를 둘러싸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맛있는 사탕도 주고 작은 선물까지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나의 얼굴에 대한 트라우마가 조금씩 치유되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친구까지 사귀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놀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방학이 되면 나는 엄마를 따라 러시아 할머님 집에 가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러시아를 알게 하려는 엄마의 바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주말마다 용산에 있는 선생님 집에 가서 나처럼 러시아 엄마와 한국인 아빠에서 태어난 친구들과 함께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러시아에 가서 현지 학교에 다니고 또래 친구들과 같이 놀았습니다. 평소 엄마는 한국어를 알아들으면서도 꼭 나와 대화할 때는 러시아어로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러시아어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엄마가 정말 많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점점 주변에 나 같은 다문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한국 사람과 완전히 똑같이 생겨서 별 차이 없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외국인 외모, 그것 때문에 좋았던 기억과 불편했던 기억 모두 가지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내가 여의도 공원에서 놀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또래 아이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서 영어로 뭐라고 했습니다. 내가 아무 대답도 안 하자, 그 아이는 내가 못 들었을까 봐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주변에 놀고 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다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져 그 순간 쥐구멍이 있으면 빨리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나는 영어를 할 줄 몰라!” 나는 크게 소리를 외치고 난 뒤 그곳을 재빨리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은 나를 외국인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한국인 친구도 있고 나와 같은 러시아 친구도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한국에서 살 계획입니다. 혹시 길에서 만나면 한국어로 인사합시다.



                                                                   © miinyuii, 출처 Unsplash




우리 이름은 준서입니다. 한국 이름이 우리 이름인 이유는 얼굴은 달라도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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