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이번에 같은 반이 되어 더 반가운 친구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
서준이는 다 좋은데 자랑이 좀 심하다. 그냥 심한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심하다.
오늘도 식탁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묵직한 수학 문제집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윤아.” 서준이가 괜히 목을 가다듬더니 물었다.
“너 수학 문제집 뭐 풀어?”
서준이가 내려놓은 수학 문제집 표지에는 큼지막하게 ‘만점왕 플러스’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부터 벌써 내가 진 기분이었다.
“나? 음... 엄마, 나 뭐 풀지?”
부엌에 계시던 엄마는 나를 한번, 서준이를 한번 보더니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윤아, 네가 가서 직접 확인해 볼래? 네 문제집 이잖아.”
요즘 엄마의 유행어는 “스스로”다.
예전엔 바로 알려주셨을 텐데, 이제는 “시계 봐.”, “네가 다시 읽어봐.”라는 말뿐이다.
나는 투덜거리며 방에서 내 문제집을 가져왔다.
서준이가 내 책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씩 웃었다.
“에이, 나는 ‘플러스’인데 너는 보통이네? 보통은 너무 쉽잖아.
내 거는 문제도 많고 응용도 많아서 정말 어려워.”
나는 순간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꾹 참으며 대꾸했다.
“그래, 천재님이시네.”
“응, 너도 이제 알겠냐?” 서준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얄밉다.
우리는 오전에 딱 4페이지씩만 풀고 놀기로 했다.
나는 요즘 지난 학기에 틀린 문제를 다시 풀고 있다.
엄마 말로는 “틀린 문제는 보물”이란다.
엄마는 내가 시험에서 틀린 문제를 모아 두었다가 AI한테 넣어 비슷한 유형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 문제들을 또 풀어 본다.
처음엔 귀찮았다. 이미 틀려서 속상한 문제를 왜 또 풀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어려웠던 문제들이 어느덧 쉬운 문제가 되었다.
옆에서 서준이는 연필을 휘리릭 돌리며 내 책을 훔쳐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야, 윤아. 너 이거 지난 학기 거 아냐? 나 이거 눈 감고도 풀겠다. 정말 쉽네.”
나도 서준이의 문제집을 슬쩍 봤다. 세상에,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았고 본 적도 없는 내용이었다.
“야, 너 이거 안 배운 거잖아. 어떻게 풀어?”
서준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하는 거지. 예습이야.”
“머리 안 아파?”
“조금.” 서준이가 이마를 꾹 누르며 덧붙였다.
“근데 뭐, 나 수학 잘하잖아.”
서준이의 연필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지우개로 벅벅 지운 흔적이 가득한 종이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저 어려운 걸 혼자 끙끙대며 풀긴 푸네. 대단하긴 하다.’
평소엔 아는 걸 왜 또 푸냐며 엄마에게 투덜댔는데, 머리를 쥐어뜯는 서준이를 보니 복습을 하는 엄마의 방식이 처음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허세는 스키장에서도 계속됐다.
강습이 끝나자마자 서준이가 우리 엄마에게 달려갔다.
“이모! 저 진짜 잘 타요! 윤이보다 제가 훨씬 빨리 내려왔어요!”
서준이가 헐떡거리며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진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사실은 완전히 반대였다.
슬로프 위에서 선생님의 목소리는 서준이만 부르고 있었다.
“서준아! 왼쪽 발 눌러! 엉덩이 집어넣고! 시선 멀리!”
반면 나에게는 벌써 "잘하네"라는 칭찬을 두 번이나 던지셨다.
이건 정말이지, 나중에 선생님이 카톡으로 보내주실 영상으로, 서준이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한다.
강습이 끝나자 나는 녹초가 됐다. 더는 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강사 선생님도, 엄마도 없이 우리끼리 리프트를 타야 한다는 게 싫었다.
리프트 앞에 아이들끼리만 덩그러니 서 있게 될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른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쟤네 뭐야? 부모는 뭐 하는 거야?’
하고 수군거릴 것만 같았다.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엄마, 나는 이제 그만 탈래.”
“그래? 윤이 실력이면 충분할 텐데. 친구들끼리 타보는 것도 경험이야.”
“슬로프 내려오는 게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냐. 나 잘 타. 그냥 리프트가 싫어..”
괜히 끝을 흐리며 말했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도 싫었다.
나조차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조금 민망했으니까.
엄마가 권했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서준이는 혼자서 씩씩하게 리프트를 타고 저 높은 곳으로 사라졌다.
서준이가 슬로프 위에서 깨알처럼 보이며 내려오는 걸 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야! 이서준! 천천히 와!!” 나는 어느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실 서준이는 혼자 스키 장비를 신는 게 서툴렀다.
만약 슬로프 한복판에서 넘어져 장비가 풀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울고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 때문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으스대는 꼴은 정말 얄밉지만,
그래도 서준이가 혹시라도 넘어질까 봐, 눈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