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견과 함께 살기
종대가 아프다는 소식에 익산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마음이 멀어졌던 사이였지만, 종대 덕분에 다시 같은 식탁에 둘러앉게 되었다.
“종대는 우리한테 가족이야. 아니, 그 이상이지” 막내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가족이라니. 어쩐지 낯설게 들렸다. “가족? 우리가?” 내가 되묻자, 막내는 피식 웃었다. “왜? 우리 가족 맞잖아.” 그래, 나에게도 가족이 있다. 이혼한 엄마와 두 딸, 그리고 강아지 종대. 누군가의 눈에는 완벽하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내겐 세상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예전에 누군가 내게 물었다. 가족이 있냐고. 순간 얼어붙었다. 배우자가 없는 나는, 가족이 있는 사람일까. 어리석게도 그때는 구성원이 다 있어야 가족이 된다는 통념에 저항하지 못했다. “언니, 이혼했죠? 가족이 없다고 하던데요” 친한 동료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그 말에 마치 발가벗겨진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전날, 길거리에서 마주친 직장 후배가 내 술자리까지 따라온 황당한 일을 하소연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먹자골목을 걷던 퇴근길. 누군가 “언니”하고 불렀다. 돌아보니 나에게 텃세를 부리던 직원이 처음으로 살갑게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처음 보는 친구도 있었다.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도 굳이 그 자리까지 따라왔다. 끈질기게 남의 모임에 끼어들어서는 남편과 가정 이야기로 대화를 몰아갔다.
“남편도 시청에 있어요. 저는 직장보다 내조가 중요해요. 가족이 우선이니깐” 그러다가 나를 확 돌아보며 웃었다. “여기 언니처럼 일만 하는 사람은 가정을 버린 것 같잖아요” 식은땀이 등줄기를 탔다. 꽁꽁 감춰온 것이 들통날까 봐 얼굴이 굳어졌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남편의 능력, 아이들의 성장, 화목한 가정에 대해 거침없이 떠들었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나에게 왜 말이 없냐며 남편 얘기를 하라고 부추겼다. 그 천진난만한 무례함 앞에서 분노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분위기에 휘말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없는 이야기를 꾸며댔다. 멋진 나의 남편에 대해서.
본인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이렇게 전날의 황당함만 늘어놓자 동료가 한 번 더 물었다. “이혼했어요?” 작심한 듯한 추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걔 일부러 그런 거예요. 골탕먹이려고.” 그녀는 정보 접근권한을 이용해 가족관계증명서까지 떼보며 사람들에게 나의 가정사를 퍼날랐다고 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내 이혼은 확인된 '가십'이었다. 그들은 쉬쉬하며 뒷담화를 나눴다. 내가 집안 얘기를 회피하는 것도 흉이 되었고, 그날도 생쇼를 하도록 조장했을 거란다. 폐쇄적인 소도시의 공직사회에서 이혼녀는 조리돌림의 대상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죄인이었다. 이혼이라는 주홍글씨가 가족관계증명서에 새겨져있는, 사람들이 그어놓은 경계선 너머의 이방인이었다. 가족을 지키려고 '가족'을 버렸지만 이들에게 나는 돌팔매질을 당해도 싼 '기형'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형제 하나 없는 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엄마 하나만 바라보며 자랐다. 그 엄마마저 재혼했을 때, 버려졌다는 감정에 휘말렸고 그 외로움 끝에서 결혼을 택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은 시작부터 삐걱댈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라는 껍데기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아이들의 눈물 앞에서 깨닫게 되었다. '가족'을 고집하는 것이 악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혼, 재판, 가난, 그리고 지방으로의 도피. 승진을 앞두고 있었지만 다른 지방으로 전출을 택했다. 기획통이라 불렸던 과거를 뒤로하고, 강등되어 민원실 한쪽에 앉아야 했다. 나는 패배자였다. 텃세와 조롱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일에 매달렸다. 술에 기대었고, 아이들과 제대로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 그 눈을 보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대못처럼 가슴에 박혀있는, 흔들리는 나를 바라보던 네 개의 까만 눈동자….
“우리 예전에 부자였지?” 혼자 집을 지키던 열 살 막내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 그 말은 가난보다 더 깊은 결핍을 드러냈다. 텅 빈 집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작은 아이가, 무력한 내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삶이 휘청이던 그즈음, 종대는 조용히 우리 곁에 왔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