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여행자 Aug 16. 2018

 ‘글 쓰는 인간’이 온다

<週刊 태이리> 제14호

생각이란 건 불쑥 나타났다가 구름처럼 스러집니다. 기를 쓰고 붙잡아두지 않으면, 그게 뭐였는지 다음날엔 생각도 안 납니다. 가만 쌓아두기만 하면 여러 생각들이 엉켜서 가끔은 머릿속이 간지러울 지경이 됩니다. 일단 뭐라도 써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어요. 쓰면 기억하느라 애쓸 필요가 습니다. 잘 아시잖아요, 막상  보면 보다 훨씬 근사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는 걸요. 정말 신기한 건요, 무언가를 종이에 적으면 거기에 끈질기게 묻어 있던 감정까지 털어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글쓰기가 도대체 뭔데 이럴까요.  본질(本質)을 꿰뚫는 세 분의 이야기를 소개해봅니다.     


#1. 유시민,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저는 2000년대 글쓰기의 대가 중 하나로 ‘유시민’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로 그를 처음 알게 됐고, 100분토론 사회자로 TV에서 다시 봤습니다. <후불제 민주주의>와 <청춘의 독서>를 읽으며 그의 깊고 따뜻한 지성에 존경심마저 가졌습니다. 현실정치에도 적극 참여하셨죠. 최근 시사예능 프로에 나와 그 해박한 지식과 말솜씨를 맘껏 보여주기도 했고요. 긴 여행을 마치고 ‘지식소매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아 기쁩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글 쓰는 모든 사람의 맏형이시죠. 물론, 유시민의 글은 김훈 작가나 소설가 한강의 경우와는 결이 좀 다릅니다.   

▲ 젊을 땐 독설가였는데, 지금은 좀 친절해졌다.

저는 유시민 작가의 말과 글을 거의 다 좋아하는데, 조금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책 <공감필법(共感筆法)>에 이런 말이 떡하니 적혀 있었거든요. “삶에는 원래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삶은 공허하다는 거예요. 달리 말하면 ‘너희들이 용 써봐야 어차피 낫씽(Nothing)’이라는 소립니다. 마치 19세기 허무주의 철학자의 절망 섞인 유언처럼 들립니다. 만약 그의 말처럼 ‘인생이란 원래 아무 것도 없고 그저 텅 빈 것’이라면, 우리는 왜 아직 자살하지 않고 꾸역꾸역 살고 있는 걸까요.             

▲ 유시민 작가가 말하는 핵심, 그건 의미(Meaning)다.

다행히 한 문장 더 들어가니, 부연설명이 바로 붙어 있습니다. “삶에는 우리 자신이 부여한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다.” 삶의 의미는 저절로 생겨나거나, 누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필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이야기죠.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삶에는 코딱지만한 의미도 남지 않게 됩니다. 슬프지만 죽는 순간 펑, 하고 그냥 사라지고 마는 거죠. 흔적 하나 만들지 못하고 죽는 건 정말 싫은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강원국, 출력하며 살아라

그 질문의 답을 ‘강원국’ 작가에게서 찾았습니다. 강원국 작가는 제가 글쓰기 무대에서 가장 닮고 싶은 분 중 한 명이세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연설비서관으로 살면서 대통령의 말과 글을 8년여 간 쓰셨습니다. 청와대는 스피치라이터라면 한 번쯤 꼭 서보고 싶은 꿈의 무대죠. ‘스피치라이터’라는 낯선 직업이 대중에게 처음 알려진 건, 이 분의 대표작 <대통령의 글쓰기>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후 <회장님의 글쓰기>를 연달아 내고 JTBC <어쩌다 어른>부터 CBS <세바시>를 종횡무진 하시더니, 이젠 누가 뭐래도 ‘글쓰기 마스터’의 반열에 당당히 오르신 것 같습니다.         

▲ 글쓰기를 배운다는 건, 내 삶을 잘 살고 싶다는 것이다.

최근 4년 만에 낸 신간 <강원국의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은 태생이 ‘관종’이다. 이들은 ‘나는 이것을 알고 있고,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고 깨달았다’고 (계속) 얘기한다. 자신을 드러낸다. 글쓰기는 ‘이것이 나다!’라고 외치는 거다.” 풀어 말하면, 글쓰기란 내 존재를 재차 확인하고 증명하는 작업이란 거죠. 맞습니다. 글쓰기는 살아온 과정을 성실하게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불가능할 것을 꿈꾸고, 한발 더 나아갈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저는 이게 바로 유시민 작가가 강조한 ‘의미부여’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는 삶을 재조명하고, 그 안에 의미를 담아내는 부단한 과정입니다.        

▲ ‘입력’의 시대에서 ‘출력’의 시대로 가고 있다.

강원국 작가는 적극적으로 나를 표현하는 삶의 자세를 ‘출력(出力)’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진 남의 말을 잘 듣고 생각을 읽는 ‘입력(入力)’을 잘 해야 성공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턴 전혀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맞아요. 앞으로는 내 생각과 내 감정, 내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말 하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입력보다 출력이 더 중요해집니다. 그걸 못하면 나란 존재는 ‘있어도 없는(I am, but none.)’것과 다를 게 없어요. 출력을 해야 내 자신으로 살 수 있고,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3. 강준만, 쓰기가 민주주 완성한다

출력이 하나 둘 모이면 하루키가 말한 ‘몸집’이란 걸 갖게 됩니다. 몸집이 커지고 한 방향으로 뭉치면 세상을 달라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촛불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 소리를 뭣하러 해!” “야, 임마 선생님 말씀하시는데!” “다들 잘 듣고 외우기나 해!” 이런 말에 곧이곧대로 순응하고 입력에 머물면 안 됩니다. TV와 신문, 인터넷에 적혀져 있는 게 다 옳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자기 뜻을 조리있게 밝히, 나와 같은 뜻을 모아야 합니다. 때로는 나와 다른 생각도 들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세상을 향해 내 멋대로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 강준만 교수는 경계를 넘나드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시대의 쓴 소리를 해온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이런 칼럼을 썼습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 초기에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에게 ‘읽기’만 가르치고 ‘쓰기’는 가르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노동자는 지시사항을 이해하면 되지, 자신의 생각을 밝히거나 발전시키는 건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걸 유시민 식으로 바꾸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강원국 식으로 말하면, 입력만 하고 출력은 하지 말라는 소립니다. 출력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것을 두려워한다니다. 강준만 교수는 “글쓰기가 민주주의를 완성한다”고 말했습니다. 표현이 곧 권력인 시대, 모두가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외치는 세상이 곧 옵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 글쓰기는 인류 진화의 한 과정이다.

흔히들 글쓰기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행위라고 합니다. 어떤 소설가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말했죠. 글쓰기는 자기 안의 세계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외롭고 고단한 일입니다. 동시에 글쓰기 지극히 사회적인 활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합리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누군가는 상상도 못할 다양한 삶을 증명하고, 아직 생각 못한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게 글쓰기의 핵심이거든. 4차 산업혁명과 함께 ‘글쓰기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걸 매일 느낍니다. 디지털혁명 속에서 꽃핀 아날로그라니, 참 아이러니하네요. 인간은 지금 ‘호모 스크리벤스(Homo scribens, 글쓰는 사람)’로 진화하는 중입니다. 독자님은 어디쯤 계신지 사뭇 궁금합니다. 한 발 더 함께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 덧붙이는 말 ▮    

1. 뭐 잘 나갔던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13년차 홍보인이었던 제가 PR의 전문분야 중 하나인 스피치라이터의 삶에 집중하게 된 건, 알게 모르게 강원국 작가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왕성한 활동을 항상 응원하며, 조촐하게나마 출력하는 삶을 꾸준히 살고 있습니다.   

   

2. 궁금해 하신 분이 계셔서 설명 드리면, 한남동 이야기는 홀수에, 글쓰기는 짝수에 쓰고 있습니다. 한남동 이야기는 소설 <한남동 원주민>의 습작과도 같은데 10회까지 진행할 생각입니다.     


3. 글쓰기와 책쓰기에 대한 소규모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제 프로필 사진을 누르고 제안하기를 누르시면 언제든지 대화가 가능합니다.     


4. “글은 생물이다.” 이 말에 공감합니다. 월요일에 제목을 정하고 한 문장을 썼는데, 수요일에 글을 마쳤을 때는 시작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습니다. 이번 글은 또 어떻게 나올지, 저 스스로 매번 궁금해서 끝까지 쓰게 됩니다.    


5. 글쓰기가 만능인 것처럼 썼지만, 출력 수단이 꼭 글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그게 점(点)과 선(線)일 수 있고, 노래와 춤, 사진과 숫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커버사진은 제가 종이에 쓰고 사진으로 찍고 앱으로 모노처리 했습니다. 한 수십 번 정도.

작가의 이전글 한남동, 너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