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여행자 Nov 24. 2019

건배사로 승진하는 사람

밖에서도 통하는 직장인의 글쓰기

누구나 자기와 눈높이를 맞추고 함께 고민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회사는 더 그렇습니다. 상사 눈치를 보거나, 시건방진 농담이나 어설픈 아부를 할 때도, 리더가 했던 말을 재치 있게 패러디해야 센스 있단 소리를 듣습니다. 심지어는 술자리 농담마저도 매출이나 비전과 어울려야 박수 받는 게 회사입니다.     


#1. 건배사의 육하원칙

술자리를 술만 먹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초보입니다. 고수들은 술자리의 진짜 목적이 건배사라는 걸 동물처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왜 모였는지(Why, 모임 성격), 우리는 누구인지(Who, 구성원), 지금이 언제인지(When, 시기), 무슨 이야기(What, 소재)를 어떻게(How, 구성방식) 꺼내는 게 좋을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앞으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Wish, 희망)를 생각하면 건배사를 어떻게 할지 답이 나옵니다. 이른 바 건배사의 육하원칙(5W1H)입니다. 건배사를 잘 하면 술자리를 휘어잡을 수 있습니다.    

▲ 건배사에도 육하원칙(5W1H)가 있다.

건배사는 술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시작은 자기소개나 감사인사를 먼저 드리는 게 좋습니다. 그 다음은 고사성어나 속담, 명언, 유행어를 인용하거나 발췌해 메시지를 만들어보면 좋습니다. 신년에는 사장님께서 조금 특이하게 ‘조선시대 스타일’로 건배사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말의 주술적 힘을 믿어서, 이미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하면 그게 정말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는 데 착안했습니다. 현종 비인 명성왕후가 셋째딸 명안공주에게 새해에 무병장수하고 잘 지낸다 하니 헤아릴 수 없이 기쁘다"라고 편지에 적은 기록도 있습니다. 사장님은 이렇게 패러디를 하셨습니다. “우리 회사가 사상 최고의 매출을 올리고 신제품이 이렇게 잘 팔리니 참 좋습니다”라고요.     

▲ 인선왕후의 편지에서도 완료형 덕담을 볼 수 있다.

노사간담회에서는 뉴스에서 찾은 건배사를 활용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연합사령관을 만난 오찬자리에서 “함께 갑시다”라고 우리말로 크게 외치면 미군들이 “Go Together”라고 영어로 화답하는 방식입니다. 협력이 중요한 행사에 꽤 잘 어울립니다. “회사를 움직이는 두 개의 큰 바퀴는 경영진과 노조입니다. 우리 회사의 발전을 위해 제가 「함께 갑시다!」라고 먼저 잔을 들면 노조위원장께서 「Go together!」라고 화답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했던 기억이 납니다.  

  

#2. 회사의 신년사

믿을 수 없지만 회사에서는 일이 아니라 건배사를 잘 해 승진하기도 합니다. 제가 예전에 다녔던 한 회사는 오랫동안 해오던 본업 외에 새로운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싶어 컨설팅을 한참 받았습니다. 자금력을 무기 삼아 관련 사업을 과감하게 확장하려는 겁니다. 사업다각화를 넘어 기업체질을 완전히 바꾸자는 소립니다.   

▲ 기업의 비전슬로건을 건배사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때 나온 비전슬로건이 ‘새로운 성공신화를 향하여’였습니다. 회사가 서 있는 곳과 한 발 더 나아가고 싶은 지점을 잘 짚어낸 표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분야에서 계속 성공해 온 저력과 가능성을 발판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자”는 뜻입니다.     

▲ 익숙하게 아는 표현을 낯설게 바꿔내면 좋다.

이때 누군가 건배사를 ’카스Cass'라고 하기 시작했는데 삽시간에 확 퍼졌습니다. 다들 감탄했습니다. 카스면 그냥 맥주 이름인데, 너무 평범한 거 아니냐고요. 다시 보세요. 카스는 ‘Creating Another Success Story’의 이니셜입니다. 이런 건배사를 처음 생각해낸 직원을 회사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비전의 의미를 곱씹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센스는 덤입니다.    


#3. 대통령의 건배사

2010년 10월 1일 이명박 대통령이 여당 의원을 청와대로 초청해 “당신멋져”(당당하고 신나고 멋지게 살면서 가끔은 져주자!)라고 건배사를 하면서 짤막하고 위트 있는 3행시가 유행했습니다. 여당과 청와대의 관계가 멀어졌던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메시지였습니다. 그때 당 대변인이었던 정옥임 의원은 “마당발(마주 보는 당신의 발전을 위하여!)로 화답했다고 하죠.    

▲ 아마도 이때부터 3행시 건배사가 유행한 것 같다.

이후 기업에서는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한우갈비(한마음으로 우리는 갈수록 비상한다), 사이다(사랑합니다. 이 생명 다 바쳐), 고사리(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해합니다), 모바일(모든 일이 바라는 대로 일어나라)과 비슷한 종류의 건배사가 여기저기 막 생겨나고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 짧고 임팩트 있는 3행시 건배사를 몇 개 외우면 좋다.

건배사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갑질이나 철 지난 과잉의전이라고 외면하기보다는, 업무의 2부 리그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발언기회’라고 생각을 바꿔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대통령께서, 장관께서, 사장님께서, 그리고 부장님께서 건배사를 따로 챙기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말  


이 내용은 책 <회사에서 글을 씁니다>로 출간되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에서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148567?scode=033&ReviewYn=Y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는 직장인, 샐러라이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