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세열 Sep 12. 2020

여행하듯 살며 돈을 벌고 싶었다. feat.워킹홀리데이

Frankston, Australia

여행을 다시 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이왕이면 여행하듯 살며 돈을 벌고 싶었다. 그리고 단순하게 비행기를 타고 한국만 떠나 있으면 ‘여행하듯’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결론은 호주였다.


서둘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고 호주로 떠났다. 그리고 이곳에서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여러 곳에서 일했지만 그중 가장 오래 그리고 꾸준히 일한 곳은 작은 마을의 한 일식당이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덕분에 손님 대부분은 10년이 넘는 단골들이었고 종업원도 식당 주인도 손님도 모두 서로 오랜 친구들처럼 지내는 오래된 곳이었다.


“나 이제 곧 일 그만둬요. 이제 여행을 떠날 시간이죠!”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메뉴를 시키던 한 할아버지에게 이제 그만둔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아쉬운 표정을 대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야 주문 제대로 받는데 그만둬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지난 며칠 동안 손님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앞으로 떠날 여행 이야기를 매번 늘어놔야 했고 손님들은 걱정과 응원을 해줬다.


작별 인사 도중 갑자기 밀려오는 손님들 때문에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잠시 쉴 틈이 생긴다. 셰프 밀라가 그사이 초밥과 김밥 몇 개를 접시에 담아 건네줬다. 

 “세열, 잠깐 쉬면서 먹어.”


나는 가능한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Yes, Chief. Thank you!”

잠시 벽에 기대 밀라가 준 초밥을 간장에 찍어 먹으니 매운 고추냉이 향이 코끝을 찌른다. 이렇게 잠시 긴장이 풀리니 문득 이곳에서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





이력서 한 뭉치를 들고 다니면서 한 장 건네는 용기조차 나지 않아 몇 시간 동안 시내를 돌고 돌았던 일.

그리고 나는 이렇게 초라한 것 같은데 잔디밭에 누워있는 이들은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게다가 날씨는 왜 이리 좋은지.

그래서 괜히 커다란 길가에 앉아 궁상맞게 눈물을 흘린 일

간신히 일을 구해 첫 주급을 받아 함께 사는 친구들과 주급보다 더 비싼 음식을 사 먹은 날.


모든 일들이 아주 오래전 일 같다.

고추냉이 향이 가신지 오랜데도 여전히 코끝이 찡하다.

이제 이곳도 곧 떠난다 하니, 하나하나가 다시 소중하게 느껴진다.


10시가 넘은 시간 한 테이블 한 테이블 사람들이 일어나자 우리는 슬슬 테이블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며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함께 일하던 친구들과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쉬움이 남지 않을 만큼 동료들과 사진을 찍고 사장의 방으로 찾아가 이번 주에 일했던 시간과 임금을 정산했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네. 그동안 수고했어.

정산한 돈은 내일 일당까지 합해서 한 번에 줄게.”

사장 마이크는 내게 악수를 건네며 인사했다.


“이곳 덕분에 즐겁게 일했어. 참! 마이크, 지난번에 말하던 벽화는 어떻게 할까?”

“아, 난 네가 항상 바쁜 거 같아서 말 못 하고 있었는데. 나야 벽화가 필요하긴 한데 내일 하루 만에 그릴 수 있겠어?”

“물론! 그러면 내일은 벽화를 그리러 올게!”





그러니까 호주에서 사는 동안 ‘노동자’로만 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지 모두 ‘노동’이겠지만 이곳에서 일반적인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그림으로 무엇인가 해보고 싶었다. 큰돈을 버는 일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번쯤은.

이미 호주에 다녀온 친구들도 쉽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고 함께 살던 호주 친구도 ‘한국처럼 이곳 사람들은 벽화를 좋아하진 않아’라고 했지만 그래도 시도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세계를 여행 중인 아티스트입니다.’로 시작하는 광고지를 만들었고 어딜 가든, 외출할 때마다 가방에 광고지 몇 십장이 담긴 봉투를 들고 다녔다.


'그렇게 열심히 광고지를 들고 다닌 결과로 해변가의 유명한 레스토랑에 큰돈을 받고 작업을 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꽤 유명해져서 옆 마을까지 초대되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라는 큰 꿈을 꾸며 광고지를 돌렸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미안 우린 프랜차이즈라 마음대로 인테리어를 바꿀 수가 없어.”


몇몇 곳은 이렇게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대부분 가게들은 잡상인 취급을 하며 쫓아내다시피 했다. 가끔은 이러고 있는 모습이 한심스럽다가도 한국에서 한 외국인이 무작정 그림을 그리겠다고 가게로 찾아오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성가실까 생각해보며 웃음을 짓는다.

‘지금 참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구나.’

그래도 간간히 오는 문의 메일과 전화는 ‘잡상인’ 취급을 받는 와중에도 용기를 갖고 계속 시도하도록 해주었다.


광고지를 돌리며 레스토랑에 출근했을 때도 사장에게도 한 장 건넸다.

“마이크, 주변에 카페나 레스토랑 하는 친구들 있으면 벽화 소개 좀 해줄 수 있을까?”

“응. 친구들 모임 할 때 한번 이야기해볼게. 그런데 우리 가게에도 빈 벽에 좀 그려도 좋을 거 같은데?”

생각지도 않은 그의 제안에 메구미 레스토랑에도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동안 서로 바쁜 탓에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 전 날이 되어서야 다시 말을 꺼냈고 벽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가볍게 이어폰을 꼽고 빈 몸으로 출근하던 때와 다르게 마지막 날은 카메라와 그림 도구를 챙겨 집을 나섰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마자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가게 밖 입구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펜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법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았는데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부는 늦은 봄의 오후 날이었다. 살며시 차가워진 손은 친구가 바쁜 시간 틈을 내 만들어준 커피로 녹인다. 


바쁜 시간에도 중간중간에 나와 그림을 구경하던 동료들은 이젠 여유가 생겼는지 아예 펜을 들고 색칠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그림은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메구미 레스토랑에서 마지막 일을 끝냈다. 다행히 사장 마이크도 벽화를 마음에 들어했고 사무실에서 봉투 두 개를 건네며 말했다..


“하나는 웨이터에게. 하나는 아티스트에게.”

그리고 마지막 악수를 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벽화 비는 어떻게 계산해야 되는지 몰라서 시급 두 배로 넣었어. 너무 적은 건 아니지?

여행 잘하고 호주 올 땐 이곳에 꼭 다시 와. 언제든지 환영이야.”


마지막으로 퇴근을 하며 마음속으로 바랐다.

하얀 선으로 그린 이 그림이 바랠 때까지만이라도, 몇몇이라도 나를 기억해줬으면 하고.
 






Instgram: @310.park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 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완벽한 여행지의 조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