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후 어느 날의 일기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불던 밤, 서울역에서 기차 아닌 버스를 기다린다. 평소보다 일찍 버스가 도착했고 텅 빈 버스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이어폰을 꼽고 아무런 취향 없이 주간 인기 100곡을 들으며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본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다!”
우연히 한 친구를 만났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오래전 친구들 소식을 주고받으며 애써 반가워했고 서로 공통점이 없는 대학 생활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친구는 넥타이 매듭을 만지며 얼마 전 치과의사가 되었다고 말했다.
“빚도 능력이지!”
친구는 대학병원 생활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마이너스 통장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몇 천만 원의 마이너스 통장은 조금 전까지 몇 천 원에 고민하던 나를 마이너스된 사람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내 목은 넥타이를 맨 친구의 목처럼 답답해졌다.
진작 넥타이를 매었어야 할 나이.
몇 천만 원의 빚을 자랑스럽게 가진 친구 대신에 잠시 반대편 검은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매는 낡아 실밥이 흘러나왔고 낡은 고무줄로 묶은 머리는 너저분하게 헝클어져 있다. 마치 제 궤도를 찾지 못해 둥둥 떠다니는 우주 먼지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몇 번 정류장에 멈춰 섰고 친구가 일어났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친구가 일어난 자리엔 반가움보다는 무거운 마음과 뒤쳐진 나만 남는다
여행이 끝난 후 일상은 머리가 긴 남자라는 점 외에는 여행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학교에 복학해 세네 살 어린 동생들과 학교를 다니며 설계실에서 밤새 과제를 했다. 그리고 종종 교수님들께 열등생 취급을 받으며 꾸역꾸역 졸업 전시를 준비했다.
마지막 학년 6월 말, 조금 이른 졸업 전시가 끝나고도 아직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취업을 할지,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미처 끝내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2학기가 시작되었고 무섭게 취업 시장이 열렸다. 일단 원서부터 넣자 라는 생각에 긴 머리를 짧게 잘랐다. 그리고 입사 원서에 단정하게 찍은 사진을 곱게 붙이듯 사진 첨부 버튼을 살며시 눌렀다.
그래도 다행히 어떤 ‘직장’을 가져야 하는지 명확한 선택은 하지 못했지만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싫어하는지 정도는 어렴풋이 알고 있어 한 손으로 셀 수 있는 곳에만 입사 원서를 제출했다.
‘최종 제출 후에는 원서를 수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수정할 것도 없으면서 괜히 ‘아니오’를 몇 번이나 눌렀다가 간신히 ‘예’를 무겁게 누른다. 며칠 후부터 TV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몇 단계에 걸친 입사전형이 시작되었다. 며칠을 고민하며 작성한 서류였지만, 그 며칠로는 부족했는지 서류만으로 여러 회사에서 탈락했고 몇몇 곳에선 간신히 면접을 볼 기회를 줬지만 결국 떨어졌다. 그렇게 계속되는 탈락 소식에 초조하고 실망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딱 한 곳에서, 그것도 가장 다니고 싶다고 생각한 회사에서 최종 합격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넥타이 맨 사람이 되었다.
이제 왼쪽 가슴에 빨간 회사 배지를 달고 넥타이를 매고 지하철을 타며 출근을 한다. 생각보다 어른들의 아침은 일찍 시작되고 있다. 다들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타이밍에 몸을 흔들며 무표정한 얼굴로 나아가고 있다. 나도 역시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이 흔들리니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이 든다.
‘이제야 그럴듯한 사회 구성원이 되었구나.’
어느새 지상을 다니던 전철이 지하로 내려왔다. 창에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폰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 저렇게 항상 피곤하고 권태로워 보이는 분이 혹시 가이드북도 제대로 없던 시절, 유라시아 대륙 육로 횡단 여행 정도는 한 아저씨가 아닐까? 하고 상상을 해본다. 어쩌면 바로 옆에서 무표정한 표정으로 스마트 폰을 보고 있는 여자도 몇 년 전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아프리카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을 상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어느덧 전철은 꽤나 달렸고 넓게 한강이 펼쳐진다.
슈퍼 히어로들처럼 그들도 우리 사이에 이렇게 숨어 지내는 거야. 그러다가 때가 되면 굵은 뿔 테를 벗고 집에서 제일 허름한 옷을 꺼내 몸짓 만한 배낭을 메고 인천 공항을 향하지. 그리고 방콕 카오산 로드로 마치 지구를 지킬 것 마냥 다들 모이는 거야. 결국엔 ‘너무 더워.’라고 투덜대며 그늘 아래에서 낮잠만 자고 있겠지만. 어때?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아?
다시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다시 지난번 같은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이제 매달 꼬박꼬박 일정한 월급이 들어온다. 그리고 언젠가는 풍족하지는 않아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잔고가 생길 것이고 꼬깃꼬깃 숨겨둔 비상금 대신 비상용 신용카드를 어딘가에 숨겨둘 것이다. 더 이상 그 도시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을 참고 넘어갈 일도 없으며 쥐가 나오는 싸구려 숙소 대신 몇 천 원, 몇만 원을 더 주고 비교적 더 나은 숙소를 찾아 나서겠지. 그렇게 언제나 포기보단 카드를 떠올릴 것이다. 지난번 보다 조금 더 풍요로운 지갑은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그런 즐거움은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
지나고 보니 참 반짝거렸던 시간이구나.
그래도 지난 여행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저 흔한 기억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