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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울 Mar 06. 2024

‘만약’이라는 세상이 있다면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2023)



인연을 믿는가? 이 말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느냐’ 같이 모호한 질문이다. 누군가는 믿고, 누군가는 믿지 않는다. 혹은 믿지 않다가도 그런 순간을 경험하거나.

인연도, 사랑도 그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어떻게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라고 확신해?” “그래서 넌 그 사람을 왜 좋아하는데?” 이 물음에 어떻게 납득할 만한 답을 할 수 있을까. “그냥.. 처음 보자마자 아, 이 사람이다 싶었고, 그래서 인연이라고 생각한 거지”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할 것이다. 논리적이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납득이 필요 없는 사랑을, 인연을 경험하곤 한다.     


제대로 ‘안녕’ 하기 위한 여정   

  

모두의 어릴 적 기억 속엔 해성과 나영 같은 이별이 있을 것이다. 알고 지낸 사이보다 훨씬 가벼워서 돌아보면 아쉬운 그런 이별들. 친한 친구가 다른 동네나 도시로 이사를 가거나, 학교를 떠나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사라지는 것. 어린 이별들에게는 서로를 갈라놓는 현실을 막을 힘이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이별은 너무 서툴러서, 때론 자신들이 하는 이별이 얼마나 큰 이별인지 알지 못한 채 지나간다.

나영과 해성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그 이별은 ‘잘 가라’라는 평소보다도 얕은 작별로 끝난다. 나영이네 가족의 이민은 둘 모두 따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이다. 하지만 나영에게 그 이별은, 본인의 의지이기도 했다. “넌 떠나야 하는 사람이었어”라는 해성의 말처럼, 나영은 어른이 되어서도 받고 싶은 상이 계속 바뀔 만큼 야망 있는 사람이다.

반면 해성에게 그 이별은 의지하지 않은, 급한 이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린 해성은 제대로 나영을 보내주지 못했다. 12년이 흐를 때까지 그는 나영을 잊지 못했고, 결국 SNS로 다시 나영을 찾게 된다.     


첫 이별로부터 12년이 흐른 24살의 해성과 나영, 이제 해성과 노라가 된 두 사람은 노트북의 이미지로 다시 서로를 마주한다. “보고 싶었어”라는 해성의 무해한 말을 들을 때마다 12년이라는 시간이 느껴져 무너질 것 같았다. 다시 만나 조금은 어색하던 두 사람은 어느새 12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장난을 치고, 매일매일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로 돌아간다. 뉴욕과 서울을 잇는 이 5분간의 몽타주는 이 영화에서 가장 밝고 아름다워서, 그래서 무너질 듯 애틋하게 느껴진다.

잠깐의 만남 이후에, 두 사람은 다시 긴 이별을 맞이한다. 이번에도 떠나는 사람은 노라이고, 해성은 남는다. “난 이민을 두 번이나 했어. 내 꿈을 위해서 뉴욕에 왔는데, 내가 자꾸 서울 가는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있는거야. .. 우리 잠깐 시간을 갖자.”라고 잠깐의 이별을 고한다. 둘은 사귀는 사이도 아니지만, 그런 말을 할 만큼 소중하고 깊은 관계임을 모두가 안다.

해성은 그 이별에 조금은 상처받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뜻을 받아들인다. 그는 현실을 안다. 그가 뉴욕에 갈 수 없고, 노라 역시 모든 걸 멈추고 서울로 돌아올 수 없다는 현실을 말이다. 현실을 거부하기에 무력했던 어린 시절을 지났지만, 그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현실 그 안에 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만남과 이별은 또 다른 12년이 지나 찾아온다. 그 사이 노라는 결혼을 해 미국인이 됐고, 해성은 서울의 평범한 직장에서 평범한 월급을 받으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세 번째 재회는 조금 뜬금없이 느껴진다. 해성은 이미 노라가 결혼한 것과 자신으로부터 점차 멀어진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도 연인이 있는(막 헤어진)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잘 흘러가고 있던 그때, 해성은 왜 12년 전 이별한 노라를 다시 찾으려, 그때는 오지 않은 뉴욕까지 날아온 걸까?

해성에게 노라는 영원히 지워지지 못하고 마음속에 남아있던 존재였다. 이미 확실한 두 번의 이별을 겪었지만, 항상 떠나는 것은 나영, 노라였으므로 그는 제대로 그녀를 보내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서도, 새로운 사람과 잘 지내면서도 노라를 떨치지 못했다.

말하자면 세 번째 해성이 뉴욕으로 온 것은 노라와 제대로 ‘안녕’ 하기 위한 가장 마지막 여정이다. 그는 세 번째에야 제대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우린 전생에 뭐였을까? 이것도 전생이라면, 우리의 다음 생에서는 벌써 다른 인연이 아닐까? 그때 우린 누굴까?/ 모르겠어../ 나도.. 그때 보자.” 마지막 이별 장면은 어느 때보다 애틋하다. 해성은 이때 처음으로 노라와 제대로 ‘안녕’한다. 그가 결국 노라와 이어지지 않은 것은 달성되지 못한 목표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이별 후, 뉴욕의 새벽을 가르며 떠나는 해성의 모습은 더 큰 희망을 남긴다. ‘해성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연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을까?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만약’이라는 세상에서는,     


“만약에, 그때 네가 만난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넌 똑같이 사랑에 빠졌을까? 마침 그때 우리가 둘 다 싱글이었고, 잠자리 상대가 필요했고, 뉴욕의 비싼 집값을 아끼려 동거를 시작했고, 네 영주권 때문에 일찍 결혼을 했던 게 전부 아니었다면 말이야. 그때 거기에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면, 넌 그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지금 이 자리에 다른 사람과 있었을까?”


‘만약’이라는 가정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지난 일을 가정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지나왔을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의 길을 상상하는 것은 소중하다. 아서는 노라와 해성의 재회에 싱숭생숭해진다. “너를 만나러 온 오랜 친구를 내가 막을 순 없지”라고 말하면서도 그녀와 해성의 인연이, 자신과 노라의 것보다 깊지는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노라는 그의 말에 아니라고 답하지만, 그녀도 속으론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만난 사람이 아서가 아니라 다른 남자였더라도, 그녀는 똑같이 사랑에 빠졌을 것이고, 아서와는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누구였는지’가 아니라, 거기에 있었던 사람이 아서라는 사실이다. 인연은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만약 그때, 12년 전에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때 내가 뉴욕에 왔다면 우리 사이가 달라졌을까? 우린 사귀었을까? 결혼을 했을까? 아이들을 가졌을까?..” 해성 또한 무의미하지만, 그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과거를, 현재를 상상한다. 그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바꾸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모든 관객이 그 고백의 결과를 짐작할 테지만, 이 조심스러운 고백은 어느 것보다 애틋하게 들린다. 그가 뉴욕으로 왔더라면, 혹은 노라가 서울로 왔더라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가늠할 수 없는 인연들     


영화가 시작한다. 관객들은 바에 앉아 있는 세 주인공을 마주한다. “저 세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 백인 남자와 동양 여자가 연인이고, 동양 남자는 그녀의 오빠일까?/ 아니야, 동양 남자와 여자가 연인이고 백인 남자는 직장 동료일 거야./ 아님 셋 모두 직장 동료인가?..” 그들의 관계를 예측하려는 보이스오버는 마치 관객들의 목소리로 들린다. 과연 저 세 사람은 무슨 관계일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들의 ‘만약’을 떠올리는 것이다. 보이스오버가 멈추면 노라는 ‘그럼 알려줄게’라는 듯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화면은 24년 전으로 넘어간다. 관객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되어, 그들이 궁금해하던 24년간의 인연을 지켜본다. 다시 영화는 현재로 돌아온다. 이제 그들이 어떤 인연인지 아는가? 그걸 모두 지켜보고도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인? 친구? 혹은 옛사랑? 모두 그들의 인연을 설명하기에 부족한 언어들이다.

    

영화의 후반부다. 해성과 노라는 함께 허드슨 강을 따라 걷는다. 우리는(관객은) 그 옆을 스쳐가는 관광객 1이다. 그리고 우린 그들을 스쳐가며 이런 생각을 한다. “저기 지나가는 연인들은 어떻게 만났을까? 연인은 맞을까? 가족일까? 동료일까? 저들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오늘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끝내 그 답을 알 순 없겠지만, 무엇을 떠올리든 그들의 인연이 훨씬 복잡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비단 해성과 노라의 인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관광객 1인 동시에, 해성과 노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인연이 그들만큼 드라마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신 옆에 있는 사람과의 인연을 떠올려보라. 처음부터, 당신이 생각하는 처음보다 훨씬 처음부터, 그 인연을 설명해 보라. 그러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과 누군가도 해성과 노라의 자리에 있다는 걸.     




서두에 이 영화를 소개하며 ‘인연’과 ‘첫눈에 반한 사랑’은 같다는 말을 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내게 그런 영화다. 첫눈에 보자마자 이유도 조건도 필요 없이 사랑에 빠져버린, (5점을 마다하지 않고 헌납한) 그런 영화.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렵겠지만, 사랑은 원래 논리적이지 못하지 않은가. 해성과 나영이 서로에게 느꼈던 것처럼, 나에게는 이 영화가 나영이고, 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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