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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울 Oct 23. 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Bonjour Tristesse>, <The Catcher in The Rye>, <Bones and All>, and <Armageddon Time>

     

요즘 들어 어떻게 어른이 되는 건지 자주 생각한다. 작년에는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바뀌면 한순간에 어른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릴 땐 ‘어른스러운 것’이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스무 살이 되니까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사실되고 싶지 않다. 평생을 애처럼 살기는 또 싫지만, 금방 어른이 되기도 싫은 투정기인가, 겁이 많은 성격 때문일까.     

     

네 이야기는 모두 폭발적인 감정은 아니다. 대체 어느 포인트가 극의 정점인지 헷갈릴 즈음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리고 물음표가 남는다. 이런 극의 특징은 이 이야기를 본 내가 희망과 절망 중에 무엇을 가지고 자리를 떠야 할지 헷갈리게 만든다. 그런데 최근 이 작품들에 대한 여러 글을 읽고, 내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어떤 지점의 감정을 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 <슬픔이여 안녕>


네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궁극적으론 낭만을 이야기하지만 절대로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잔혹함을 보여준다. <슬픔이여 안녕>의 세실은 아빠의 여자친구인 ‘안’이 자신의 세계를 점점 무너뜨리려 하자, 그와는 절대 타협할 수 없음을 알고 그녀의 세계를 파멸시키는 데에서 슬픔을 떠안는다. 제목과 마지막 문장에서도 언급되는 ‘슬픔’은 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세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어른의 과도기를 겪는 소녀의 슬픔이다. 그녀는 이렇게, 어떤 부분에선 세상과 타협할 수 없음을 안다.

     

'슬픔이여 안녕'에서의 슬픔은 안을 죽게 한 일을 후회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 틀에 맞춰 살기를 바라는 세상과의 충돌에서 상대를 파멸시키더라도 자신을 지켜나가야만 하는 운명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슬픔이다.

<슬픔이여 안녕>이 뛰어난 작품인 것은 자아의 성장 과정에서 경험하는 경계의 생성과 충돌을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성공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슬픔이여 안녕>이 헤세의 <데미안>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경계를 인식하고 세상과 화해할 수 없음을 깨닫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슬픔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 슬픔을 감내하고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을 때 자기만의 삶이 시작된다.     


주인공 세실은 자신의 세상(낭만)을 지키기 위해 안의 세상을 파괴시켰지만, 앞으로 살면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세계와는 화해할 수 없음을 깨닫는 자기 세계의 또 다른 붕괴이자 아이러니를 인식한다. 그렇게 모두는 필연적인 슬픔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살아갈 용기를 이야기한다. 세상의 온갖 칼바람들의 무서움을 이야기하며 겁을 주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아주 아주 아주 복잡한 이야기라고 느껴진다.


나의 내면은 무의식 중에 온전하고 부서지지 않은 세계를 갖길 원했다. ‘세상이 어떤 바람을 불어도 절대 지지 않을 세계를 쌓아 올리겠다’하는 ‘멋모를’ 자신감이었을까. 여기에 스스로 ‘멋모를’이란 단어를 붙이고 싶지 않은 것도 그 이유다. 누가 내 세계를 아는 척 함부로 대하지 않길 원하는 세실과 비슷하다. 나의 경계는 어디까지이며 과연 지켜질까? 하지만 ‘절대 세상과 타협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결국엔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하는 (듣기 싫은) 절대적 진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두발 붙이고 살아있는 한, 나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아주 유치한 이야기지만, 나는 커피를 마시는 순간 어른이 되는 거라 생각했다. 어디선가 본 글이 있는데, ‘커피에 의존하지 않고 아침을 보낼 수 있다면 성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이었다. 어린 나의 눈에는 커피는 어른의 것이라는 유치한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론 어른이 되길 주저하는 마음이, 커피를 물 마시듯 들이켜는 어른의 모습을 닮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온전한 아침을 보낼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야 말았다. 몇 번이나 그 과정을 지나고서야, ‘아, 나도 결국 커피를 마시게 되었구나’하는 작은 탄식이 흘렀다. 커피가 아니라 ‘무언가’에 의존하며, 그리고 타협해 가며 삶을 유지해 나갈 수밖에 없는 슬픔은 여기저기 존재한다.           


2. <호밀밭의 파수꾼>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결말이 아주 낭만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호밀밭에서 떨어지는 아이들을 잡아주고 싶다는, 센트럴 파크의 겨울이 오면 연못의 오리들의 거취를 궁금해하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어른의 세상과의 경계에서 헤매다 결국 갈피를 잡은 듯하다. 결말의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은 바로 유일하게 그의 순수함, 혹은 동심을 붙잡아주는 여동생 피비의 모습 덕분이다. 그로써 그는 파괴될 뻔한 자아를 잘 가꾸며 세상을 살아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책을 다시 읽다가, 그 결말이 홀든이 ‘순수함을 지키고 나아가는’ 게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며 어른이 되어갈 홀든의 이야기’라고 느끼게 되었다. 예를 들면, 홀든은 서부로 혼자 떠나는 계획을 단단히 세우지만, 여동생이 만류하자 금방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결말의 홀든은 그가 절대 편입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어른들의 사회에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호밀밭에서의 추락’은 세상과 타협하며 순수를 더럽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성장통을 겪던 홀든의 이야기가 한편으론 씁쓸하게 느껴지지만, 나의 세상도 결국엔 홀든처럼 타협하며 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너희들은 다 틀렸고 나만 진짜야’라는 홀든의 치기 어린 반항도, 결국엔 타협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낙담시키기도 했고, 동시에 그런 일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듯 들렸다. 희망과 절망의 이분법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세상과의 타협을 거치며 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홀든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물어오지만, 홀든은 때론 답하지 않는다.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여동생이라던가, 먼저 떠나버린 둘째 동생 이야기라던가. 그는 이런 소중한 이야기들을 꺼내버리면 그 소중함이 남에 의해 가벼워지는 게 싫어서, 그걸 말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소중함이 증발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속으로만 간직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내면의 순수를 지키고 싶은 홀든의 방식일지 모른다. 때로 외부는 누군가의 소중함을 곡해하려 하지만, 그걸 말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 하나의 타협일 수도 있을 것이다.


3. <아마겟돈 타임>


<아마겟돈 타임>은 나에게 확신이 아닌 물음을 남겼다. 내가 흔들리는 만큼 불확실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한편으론 ‘결국 타협 없이 세상을 살아날 순 없는가?’에 대한 물음을, 한편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 밖으로 작게 내딛는 나의 한 걸음이 나의 희망이, 나의 구원이 될 수 있지 모른다’라는 질문을 남긴 복잡한 영화였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이게 희망 혹은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내가 극의 미적 아름다움에 감동을 해야 할지 극의 모호함을 비판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제목 그대로 ‘아마겟돈’이다. 하지만 제임스 그레이의 의도대로, 나는 확실한 답을 얻기보다 오래 지니고 다닐 질문을 영화로부터 얻었다.


학교에서의 차별이 울타리 안에서의 처우였다면 이건 회복불가능한 갈림길로의 진입인 셈이다. 그렇게 보호받던 소년의 울타리가 깨어지고 잔혹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 소년은 각자 다른 길을 걸었던 아버지, 어머니, 외할아버지를 떠올린 후 비로소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자신을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준 어른이 사라졌음을 슬퍼하는 어빙의 눈물은 마침내 숨을 거둔 아름다운 시대,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향한 애도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고, 기억을 버팀목 삼아 오늘을 산다. 아직 잃어버린 낙원을 포기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이름의 유령들과 함께.

“세상과 싸우는 게 힘들지. 그렇다고 포기하진 마. 노력해야 해.”

그리하여 폴은 사립학교에서의 연설을 가만히 듣는 대신 조용히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아마겟돈 타임>은 이미 망해버린 세상에서 동시대 유령들과 함께하기로 한 폴의 마지막 걸음을 통해 우리에게 희미한 가능성과 선택지를 제시한다. 진즉에 끝난 것 같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다고. 당신의 선택이 시대의 흐름과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나’라고 하는 우주, 하나의 세계는 지킬 수 있다고.     


처음에 이 영화의 결말은 절대 희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나에게 굉장한 찝찝함을 남겼다. 이 영화가 찝찝했던 건, 어딘가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언가 걸리는 부분은, 마지막 연설을 듣지 않고 뛰쳐나온 폴과, (아마도 폴의 것이었을) 시선을 따라 남겨진 공간을 빠져나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왠지 ‘이 세상의 모든 대세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어른들의 때가 묻더라도, 당신만의 세상에서 무엇인가 바꿀 수 있지 않을까’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주인공 폴은 가족의 기대와 달리 엇나가다 사고를 쳐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하지만, 우연히 아버지가 경찰관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다. 다만, 아무런 연줄도 없던 그의 흑인 친구는 그와 같이 도둑질을 했지만 홀로 경찰서에 남게 되는 것이 영화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폴은 중산층이기에 얻은 기회로 집에 돌아오며, 결국 체념에 가까운 절망을 느낀다. 하지만 마지막 연설을 듣지 않고 뛰쳐나온 폴과, (아마도 폴의 것이었을) 시선을 따라 공간을 빠져나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왠지 ‘세상의 대세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어른들의 때가 묻더라도, 당신만의 세상에서라면 무엇인가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폴은 주변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칸딘스키 같은 예술가를 꿈꾼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현실적인 추궁을 벗어나게 해주는 할아버지라는 유일한 도피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폴에게 좋은 조언과 포용을 준다.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가 곁을 떠나자, 거짓말처럼 그의 세상은 현실적인 압박들로 가득 찬다. 결국, 그는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친구와 이별하고, 새로운 학교에 적응해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건 그가 중산층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폴은 새로운 기회를 얻었지만, 그와 똑같은 도둑질을 한 그의 친구는 앞으로 미래를 보장받지 못할 위기에 처해버렸다. 아마 그의 미래는 영화처럼 극적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씁쓸하다.

과연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이런 씁쓸함만을 남기기 위해, ‘현실은 당신의 낭만과 달리 차갑고 씁쓸하다’를 말하려고 자신의 유년 시절을 끌어왔을까? 적어도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그가 말해주는 어른의 세계와 현실은 ‘차갑지만, 꼭 씁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한 명의 어른이라도, 없다면 스스로에게라도 그렇게 말해주었으면 한다. 최대한으로 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그 경계선에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보고 싶다.

 

4. <본즈 앤 올>


<본즈 앤 올>은 나의 기대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폭발적이기보다는 고요하다. 여전히 난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봤을 무렵, 난 글을 쓰는 게 너무 힘들었다. 영화를 보는 태도도 의도와는 다르게 삐뚤어져서 더욱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한 단어를 고르는 게 조심스러웠고, 나의 내면이 점점 자연스러운 감상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이 영화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려고 했다.

여전히 난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며 가닥이 조금 잡힌 것도 같다. <슬픔이여 안녕>의 세실이 타인의 세계를 무너뜨려야만 자아를 지킬 수 있던 모순처럼, <본즈 앤 올>의 매런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이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카니발리즘으로 뼈까지 먹어치우고 나서야 성장할 수 있다.


‘본즈 앤 올’을 하기 전과 후는 정말 다르다.     


이런 모순을 곱씹는다. 매런은 부정했지만, 리의 말처럼 카니발리즘은 그녀의 본능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녀가 보였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본능으로 식인을 하는 자신과 달리 일종의 미식으로 사람을 먹기 시작한 남자를 경계한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엄마를 처음으로 보고 자신의 본능을 부정한다.

 

하지만 결국은 리의 말처럼, 그녀는 가장 사랑하는 리를 먹고서야 다시금 일어선다. 그녀가 ‘사람을 먹는’ 걸 본능으로 여기는 것은 ‘사랑을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 같기도 하다. 결국 모두는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갈망한다. 매런에겐 사람이 사랑이었으리라. 가장 사랑하는 것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모순을 견디며 그녀는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먹어야만 나아갈 수 있다는 고통을 견디면서, 그녀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게 최선의 성장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아마 각자 다른 형태로 이런 성장통을 겪을 것이다. 세실이 떠안은 슬픔처럼, 추락을 붙잡아주고 싶은 홀든처럼, 폴이 자신의 세상을 지키는 것처럼, 매런이 사랑하는 사람을 먹어치우고서야 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네 성장 이야기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그들의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로부터 앞으로 살아갈, 어른이 될 용기를 얻었다는 역설이다. 나에게도 유효한 말이다. 스물에 누군가의 죽음을 겪는다면(혹은 긴 이별을 겪는다면), (90 즈음까지 산다는 가정하에) 나는 70년 동안 다시 만나지 못하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 것이다. 내가 그 사람과 나눈 시간보다도 그리움의 기간이 길다는 걸 떠올리면 벌써부터 겁이 난다. 하지만, 결국은 앞의 모든 이야기의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움을 묻은 채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살다 보면 많은 이별과 만남이 있고, 성장과 통증도 있을 것이지만, 살아있기 때문에 통증마저 사람을 성장시킨다.(그렇기를 정말 바란다.)


성장, 즉 삶에 있어 또 다른 챕터로의 이행은 많은 경우에 이별의 극복을 수반한다.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극복하지 못할 것만 같던 이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좋은 작품들은 결코 성장하지 못할 것 같던 인물의 성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회복 혹은 굳건한 의지가 아니다. 타협하지 못할 것 같던 세상과 공존해 가는 과정, 결국은 그런 세상 앞에서 왜 자기변명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정당화한다. 인물의 성장을 통해 독자와 관객은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좋아하는 신형철 평론가의 한 구절을 덧붙이자면, "잘은 모르겠지만, 성장이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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