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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울 Oct 31. 2023

영화를 만드는 일과 영화를 보는 일

어쩌다 보니 지난여름부터 이번 가을까지 영화와 가까이 있게 됐다.


8월 중순에는 조연출로 촬영에 참여했다. 고3 때 내 영화를 도와주신 형이 만드는 단편영화였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던 건 4월쯤이었다. 그때부터 한 달에 몇 번씩이나 만나 연출부 회의에 참여했다. 내가 고3 때 찍은 영화 촬영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정돈된 프리프로덕션이었다.(당연히 이게 맞지만)


그때를 생각해 보면 즐거운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인원이 부족해서 친구들을 모아 연기를 부탁했고, 마이크와 슬레이트를 쥐여줬다. 많은 장소와 소품을 자체적으로 마련했고, 대부분의 지출은 식비뿐이었다. 그렇게 익숙한 곳들을 쏘다니며 가장 더운 여름에 영화를 찍었다.

촬영을 하며 고맙고 미안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였다면 아무런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고3 여름방학에 친구 영화를 도울 수 있었을까? 그 친구들에게는 평생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 여름 동안 같이 촬영하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았고, 같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가는 일의 재미를 처음 느꼈다. 물론 힘들었던 것도 있었다. 평소에도 선택을 잘 못하는 나에게 감독이라는 직책은 모든 것을 바로바로 결정해야 하는 자리였기에 항상 고민이 많았다. 이걸 이렇게 찍어도 되는 걸까.. 하는 고민 말이다. 기다리는 팀원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면서 내 부족한 점도 알고 정말 많이 배웠다. 가장 큰 건 역시, 아 이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영화를 못 찍었겠다, 였다. 어떤 일을 하느냐 만큼, 누구와 일하느냐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프리프로덕션을 거치며 처음으로 배우 오디션을 보고, 리딩도 참여하고,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고민하며 머리 싸매는 모습도 가까이서 지켜봤다. 사실상 모든 게 처음이었기에 신기함 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한영위에서 한 제작 지원 설명회도 따라갔다. 사실 PD님이 왔어야 했는데, 일정상 나와 감독님 둘이서 갔다. 한영위 제작지원금은 이렇게 쓰는 거고, 영수증 처리는 이렇게 하고, 배우들 페이는 이렇게 해야 하고, 통장은 이렇게 만들고, 신고는 이렇게 정리해서 올리고,.. 결국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영화를 하면서 드는 생각은, 정말 정말 상상 이상으로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스크린 안에 모든 것이 돈이고, 심지어 그 밖의 것들도 다 돈이다. 정말 영화 만들기 어렵구나..


어찌어찌 프리를 마치고 촬영에 들어가게 됐다. 내 역할은 인물 조연출이었다. 기본적으로 배우들 캐스팅부터, 의상과 메이크업을 컨티뉴이티나 세팅에 맞게 관리하고, 촬영에 잘 들어가기 위한 전반적인 배우들의 관리(픽업이나 쉬는 시간 관리 등등..)를 모두 도맡았다. 스탭 중에 내가 제일 어리고 경험도 적어서 연출에 관한 일들은 경험이 많은 분들이 주로 맡았다.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나 스스로 촬영장에서 헤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조금 더 세세하게 신경 쓰려고 해도 처음엔 도무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나 스스로도 독하게 하자는 마음은 못 먹어서 그렇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초중반엔 쓴소리도 조금 들었다. 그런데 들으면서 기분이 나쁜 건 전혀 없었고, 그저 더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원체 나는 좀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다. 피해를 끼치지도 않지만, 내가 희생하는 선을 넘어서 남을 위해 나서본 적도 거의 없다. 그런데 배우를 제외한 스태프분들은 대부분 페이도 받지 않으시고, 감독님과의 인연만으로 도우러 오신 분들인데도 자신이 희생하면서까지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나섰다. 다음 촬영이 늦어지지 않도록 끼니를 거르고 먼저 준비하러 가거나, 가장 더운 날 야외무대를 짓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골든아워를 잡기 위해 맨발로 아스팔트를 몇 번이나 왕복했다.

설령 그것이 자기에게 분담된 일이더라도, 희생을 감수하고 헌신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스태프들의 노력을 보며 처음엔 자기 영화도 아니고 참여만 하는 것인데 다들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지만, 어느샌가 나도 그렇게 영화를 돕게 됐다. 한편으론 내가 돕는 이 영화가 정말 잘 만들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또 한편으론 나를 믿고 일을 맡겨 준 감독의 계획이 백 퍼센트가 될 수 있도록. 영화는 그런 마음이 없으면 잘 만들어지기 힘들지 않을까.


마지막 날은 가장 바쁘게 움직였다. 내가 관리해야 했던 엑스트라 수가 가장 많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골든아워 촬영이 있었다. 그래서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고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그리고 촬영이 끝나고 마지막 정리까지 발에 땀나게 뛰어다녔다. 아, 전날에도 이렇게 확실히 준비했더라면 실수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나의 그런 노력이 좋은 영화가 완성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


영화를 두 번이나마 찍어보며 느낀 점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촬영에서도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종일 같이 땀 흘리면서 영화 하나를 위해 각자의 일을 노력하는 모든 과정이 즐겁다. 영화가 뭐길래.

대부분 나보다 경험이 많은 분들이라, 배우들에게도, 스태프들에게도 많이 배웠다. 오래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촬영에 임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금방 알 수 있다.


나는 조연출이라서 모니터를 옆에서 자주 바라봤다. 카메라에 담긴 '영화가 될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언젠가, 머지않은 날에 나의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나는 글을 쓰는 게 즐겁고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요즘 내가 과연 좋은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선 많이 고민한다. 영화는 어쨌거나 픽션이고, 관객에게 가닿아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좋은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을까 의심도 많이 들지만, 지금으로선 어떻게든 그것을 만들어 내보고 싶다. 내가 품고 있는 소중한 장면들을 직접 스크린에 펴놓고 싶다.




지난달에는 처음으로 영화제 자원활동가로 일했다.


여름 여행 중에 우연히 공고를 보고 지원해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뷰까지 마쳤는데, 운 좋게 합격했다. 언젠가 꼭 영화제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면접 때 왜 영화제에서 일해보고 싶냐는 질문에,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영화와 가까이 있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프로그램이벤트팀으로 일하며 주로 GV나 대담 같은 이벤트를 담당했고, 가끔은 상영관 관리도 도왔다.

국제영화제인 만큼 외국인 감독들이 정말 많았고, 예상치 못했지만 영어로 대화할 일도 자주 있었다. 항상 감독님들을 에스코트할 일이 생기면 만나서 영광이라고 인사를 건네었는데, 그럴 때마다 친절한 감독님들은 반대로 내 이름을 물어봐주셨다. 뭐 평생 내 이름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다정하게 이름을 물어봐 준 것만으로도 너무 설렜다. 감독님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프이벤팀으로 일하며 GV를 정말 많이 들었다. 내가 본 적도 없는 영화에 대해 듣는 일이지만, 왠지 GV를 듣고 있으면 그 영화가 궁금해지곤 했다. 그래서 괜히 공부하는 기분으로 프로그램 시트 밑에 끄적끄적 좋은 말들과 문득문득 든 생각들을 적어두었다. 언젠가 이 영화를 꼭 봐야지, 했지만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이 많다.


보통 GV를 담당으로 상영관을 지키고 있으면 맨 앞줄에서 관람하게 되는데, 통역 과정을 보고 있으면 저걸 어떻게 다 통역하는 걸까 신기했다. 언어력도 중요하지만 3분 가까이 되는 멘트를 외우기 위해선 기억력이 좋아야 될 듯 싶다. 저런 일도 재밌지 않을까? 나는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저런 일도 해보고 싶어졌다.


시니컬한 진상 관객을 상대해야 하거나, 자기를 너무 과시하는 모더레이터를 만나 GV가 싸해지는 경험도 있었고, 신기한 경험들도 많았다. 한 번은 이터널 메모리 상영날이었다. 관객이 제일 많이 몰렸고, 상영 후 실제 출연자분이 직접 GV를 진행하셨다. 나도 가장 궁금했던 영화라 양해를 구하고 상영관 안에서 영화를 함께 보며 GV를 준비했다. 딱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가 되어 상영관 문을 여는데, 방금 스크린에서 보던 얼굴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웃어 보이기만 했는데, 나를 향해 윙크를 지으며 엄지를 날리고 극장으로 들어가셨다. 대충 너무 감동받았다는 내 표정을 이해하신 걸까. 영화와 현실이 기묘하게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영화도 너무 좋았지만,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일주일 정도 함께 일하다 보니, 결코 친해지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과도 다들 편해져 있었다. 사실 끝나는 게 조금은 아쉬웠다. 영화제에 모인 사람들은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 떠들고 같이 일하는 분위기 자체도 너무 즐거웠다. 인간관계를 가장 피곤하게 느끼는 나 역시, 이럴 때면 역시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구나를 느낀다.


도대체 피치에서는 무슨 얘기를 해야 제작비를 받을 수 있는 건지 내심 궁금해서, 마지막날 피치 시상식을 구경했다. 피치는 아직 제작 중이거나 완료한 작품을 가지고 온 감독들이 열띤 설명(?)으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거라고 (대충) 알고 있다. 마켓 시상식에 처음 갔는데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서 놀랐다. 딱딱한 분위기일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감독들이나 스태프들이나 오랜 기간 마켓을 같이 하다 보니 서로 친한 분위기가 된 것 같았다.

시상식을 보면서 그들이 정말 영화에 열정이 넘친다는 걸 한눈에 볼 수 있었다. 2시간으로 압축한 누군가의 열정이 저렇게나 반짝일 수 있다는 게 고결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들은 정말 영화를 사랑하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자극도 많이 받았다. 나도 무언가에 저렇게 열심히 매달려보고 싶다.


내 영화도 아니었지만, 괜히 정성스럽게 준비한 영화 앞에 사람들이 적게 모이면 나도 따라 아쉬웠고, 설레는 표정으로 입장한 관객들로 극장이 가득 차면 어느 때보다 뿌듯했다.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스크린 앞에 모인 사람들을 볼 때마다 좋았고 벅찼다. 같이 일한 사람들도 분명 모두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언젠간 나의 영화도 극장에 걸릴 일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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