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역사>의 인상적인 문장들
위대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그들의 답에 놀라본 적이 별로 없다. 그 답은 너무 소박하거나 반대로 너무 거창했다. 그러나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 87p.
그 죽음은 분명 자식에 대한 사랑의 좌절로 인한 것이지만, 일종의 움켜쥠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움켜쥔 채 살고 있는 것인지.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허공 한 줌 속에도 얼마나 많은 감정과 집념이 들어있는 것인지. 삶과 죽음도 결국 그 움켜쥠과 놓아줌의 다른 말이 아닌지..
-104p.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 같이,
번개 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사랑의 발명 中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난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 131p.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은데, 이룬 것이 너무 없어 당황스러울 때, 그때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위험한 때다. (..) 빨리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마음에 지면 나를 잃고 꿈은 왜곡된다.
그러므로 서두르지 않는 마음이란 현실 앞에서 의연해지려는 마음이다.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말이다. 달은 지구를 따라 끝없이 돈다. 이상(꿈)이 현실(삶)에 내려앉지도 못하고 그렇게 겉도는/헛도는 사태를 보는 일은 괴롭다.
- 228p.
타자애와 자기애는 동전의 양면이다. 나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데 성공한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 선순환이 실패한 경우 상황은 반대가 된다. (..) 프로이트에 서정주를 섞어 말한다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팔 할이 실패한 사랑의 역사'다.
- 275p.
"나는 처음부터 시가 그 속에서 무언가 일어나 시적 자아가 조금씩이나마 변하는, 거듭하게 되는, 장이 되는 구조물이 되기를 바랐다. 거듭 말하지만 해방은 변화에 있는 것이다." 보다시피 황동규는 '시적자아의 거듭남이라는 현상에 매혹되어 그것을 하나의 시론으로 정리하고 그 가장 훌륭한 사례들에 해당할 시를 썼다.
- 295p.
"'조금'이라고 했지만 인간의 변화는 그 '조금'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 타자와의 조우야말로 우리를 가장 결정적으로 변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믿는다.
- 296p.
이 시가 이토록 내적 역동성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이제 그만 죽어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한 타자가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타자가 들어와야만 시의 '나'도 낯설어질 수 있는 것이다.
- 300p.
"'나'와 '타자'는 미리 독립된 두 항으로서 자존적으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속에서, 사건으로서 동시에 생성한다." 그러므로 시의 '나' 역시, '너'를 만나는 사건 속에서, 사건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 303p.
그런데 그(박준)에게서 흥미롭게 나타나는 현상은 그 회상의 시들을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본다'는 상황만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에 도착한다'라고 말해야 할 상황으로 그리길 좋아한다는 점이다. (..) 과거의 어떤 말들이 시간을 건너 현재의 내게로(어딘가로) 도착하는(흘러가는) 순간을 그리는 시가 이렇게 많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 숲 中
- 309p.
시는 엄청난 타자 - 예를 들면 동물 같은 것 - 를 동일화하지 않고, 타자 그 자체로서 어떻게 발화할 수 있는 가를 고민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 연극에 불과하지 않게 되고, 시를 팔아먹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취소(annulation)는 이렇다고 한다. "사랑의 고유한 변태성에 의해,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라는 것. 즉 그것은 fake love라는 것.. 대상을 타자로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행위에 잘못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그 사람이 이처럼 작아지고 축소되어, 그 자신이 야기한 감정에서 조차 제외되는 것을 보면서 이내 괴로워한다. 그리하여 그를 버린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비난한다. 하나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나는 그 사람을 취소하는 것을 취소하려 하며, 또 자신을 괴로워하게끔 강요한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
예전에 들었던 한 수업의 교수님은 사랑하는 것은 곧 취소하는 것, 역전을 수행하는 것, 책임과 의무의 사랑이더라도 동일화의 행위를 지우고 타자로 다가갈 수 있는 행위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처음엔 사랑이란 행위가 타자에 대한 동일성, 타자와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사랑을 말할 때는 흔히 '둘이 하나가 된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건 사랑이 아니라 사실 욕심일 수도 있겠다. 타인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 혹은 나에게 편입하려는 욕심. 건강하고 멋있는 사랑은 타자를 타자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 타인의 타자성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로부터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관계성으로부터 태어나는 '나'가 있다." 신형철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그 사람과 함께한 나'의 정체성의 죽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따르면, 사랑은 새로운 나의 탄생이기도 하다.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의 탄생이자 또 다른 나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