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는 것, 성장의 아이러니

<데미안>의 인상적인 문장들

by 주울
나는 몹시 당황했다. 이 십자가 수난 이야기는 나 자신이 내 집처럼 편안히 확신해도 된다고 믿었는데 지금 비로소 내가 얼마나 개성 없이, 얼마나 상상력과 환상 없이 그것들을 듣고 읽었는지 알았다. 그럼에도 데미안의 새로운 생각은 치명적으로 들렸고 그 존속을 고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내 안의 개념들을 전복시키려 위협했다. 아니다. 그렇게 아무나, 지고의 성인까지 마구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 82p.


'금지되었다'라는 것은 그러니까 영원하지 않아, 바뀔 수 있는 거야. (..) 그러니까 우리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금지된 것은 결코 할 수 없어. 금지된 거을 하면 대단한 악당이 될 수 있지.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사실 그건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 늘 그러게 마련이듯이 그런 사람은 살기가 쉬워. 다른 사람들은 운명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느끼지. 그들에게 명예로운 남자라면 누구나 날마다 하는 일들이 금지돼 있어.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폄하되는 다른 일들은 허용돼 있어. 그러니 누구나 자기 자신 편에 서야 해.

- 85p.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128p.


자네가 죽이고 싶어 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개 씨가 아닐세.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에 불과하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 149p.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 짓기일뿐이야. 사람들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때문이야. (..)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 모두가 그들의 삶의 법칙들이 이제는 맞지 않음을, 자기들은 낡은 목록에 따라 살고 있음을 느끼는 거야.

- 180p.


새로운 날은 소년 시절의 성탄절 잔치 이후 더는 겪어 보지 못한 장엄한 축제일처럼 밝아 왔다. 나는 속속들이 동요했다. 그러나 불안은 전혀 없었다.

- 183p.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날 거야. 너는 어쩌면 다시 한번 나를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 넌 너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걸. 알아듣겠니? 그리고 또 뭔가 있어! 에바 부인이 말했어. 네가 언젠가 잘 지내지 못하면 나더러 네게 당신의 키스를 해 달라고. 나에게 주어 보낸 키스를... 눈을 감아, 싱클레어!"

- 218p.




데미안에 앞서서 싯다르타를 먼저 읽었지만 실제로는 데미안이 3년 앞서서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뚜렷한 헤세의 개인적인 가치관이나 작품의 테마 때문인지, 두 책이 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데미안에서 제시했던 화두가 싯다르타에 이르러 동양철학과 만나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성찰의 소설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에 흔히 따라오는 '성장 소설' 같은 수식어는 사실 그 내용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성장도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자아의 발견과 성찰이 있다. 본질적인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가 있다. 책의 서두부터 싱클레어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가족들과 집이 있는 밝은 세계와 자신을 괴롭히는 크로머가 있는 어둠의 세계. 세계에 대한 이분법은 곧 자아에 대한 이분법과도 같아서, 즉 싱클레어의 내면에 두 세계가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라는 연상의 조언자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되면서 두 세계의 혼동을 해결하는 듯 보이지만, 그로 인해 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길은 자기 합일 - 두 가지 세계의 경계를 흐리고 하나의 자신을 찾아가는 길 - 에 가깝다.


싯다르타에서도 반복된 가르침. 세계는 내면의 투영이다. 때문에 헤세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훈육하는 것은, 자식에게서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단점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세계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면에 없는 것은 아무리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더라도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면에 '질투'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만사를 질투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질투하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면, 시기질투가 만연한 관계 속에 있더라도 평온할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닌, 우리 안에 들어선 혐오의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데미안은 개별의 타자이기도 하지만, 싱클레어 내면의 또 다른 자아라고 볼 수도 있다. 결말에 이르러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전장의 병동에서 조우하게 되고, 데미안은 그에게 최후의 말을 남긴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날 거야. 너는 어쩌면 다시 한번 나를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 넌 너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걸." 성장은 하나의 자신을 죽여야만 달성할 수 있는 과제다. 소설에도 이와 거의 비슷한 표현이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세계를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을 때와 그것을 잃었을 때의 우리는 결코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싱클레어가 달성하려는 성장은 자신 안의 또 다른 나를 죽여야만 달성할 수 있는 성장이며, 그것이 데미안인 것이다. 때문에 데미안은 더 이상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자아에 귀를 기울이면 그곳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말한다.


'아브락사스'. 그것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이자 악마이다. 아브락사스는 양면적인 존재다. 그것은 세상 만물의 이치와도 같다. 두 세계의 합일을 꿈꾸는 싱클레어의 내면에는 이 아브락사스가 있다. 착한 사람의 내면에도 악의 본능이 있다는 것. 반대로 절대악과 같은 존재의 내면에도 조금의 선함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혐오의 구석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아브락사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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