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의 인상적인 문장들
이연이 읽은 많은 희곡 속 사건은 '초대'와 '방문', '침입'과 '도주'로 시작됐다.
- 41p.
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맛을 음미하며 지금 이 순간 홀로 집에 가고 있을 엄마를 떠올렸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 온 일일 텐데.' 다들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 205p.
잠시 후 노래가 끝나자 헌수는 '왠지 '가지 말라'는 청보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배웠어'라는 가사가 더 슬프게 다가온다'라고 했다.
- 238p.
"만약 지금 너를 다시 만난다면 네가 틀렸다고, 이건 '안녕'이 아니라 '암 영'이라고 고쳐주는 대신 그래, 가만 들어보니 그렇게도 들리는 것 같다고, 콘크리트 보도에 핀 민들레마냥 팝송 안에 작게 박힌 한국어, 단순하고 오래된 '안녕'이라는 말이 참 예쁘고 서글프다 해줄 텐데"라며 작게 훌쩍였다.
- 241p.
그런 사람은 '경제적 인간(호모에코노미쿠스)'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일 텐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인간을 모르지 않는다. 나열된 항목 중에 '이웃'에 밑줄을 치고 나서 나는 김애란의 이번 소설집으로 돌아온다. 그럴 필요 없는데, 아니 그래선 안 되는데, 언제나 '경제적 인간'으로만 살아가게 되어버린 우리가 이 책에 있다. 그들은 제 이웃을 제 돈과 같이 사랑하거나 그보다 덜 사랑한다.
- 285p. 해설 中
헤겔은 타인에게 인정받아 우월해지고 싶은 두 '자기의식' 간의 투쟁과 그 역동적 결과를 흔히 '주인master과 노예slave의 변증법'이라 불리는 논리로 설명했다. 비슷하게 말해보자면 '홈 파티'나 '이물감'에서 김애란은 두 '계급의식'의 대결을 '주인host과 손님guest의 변증법'으로 포착해 보여준 것이다.
- 292p. 해설 中
그러나 '안녕이라 그랬어'의 대화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진귀한 감정은 모국어가 다른 두 사람의 서툰 대화가 오히려 진정한 소통을 이뤄낸다는 역설의 산물 같다. 이 소설은 "번역중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상실과 누락"과 "체지방을 줄인 담백한 몸처럼 한정된 어휘가 만드는 문장만의 매력"을 모두 인정하는데, 특히 후자에서 체지방만 나가는 게 아니라 뜻밖의 진심이 들어오기도 한다는 건 번역-대화에서 생겨나는 작은 신비다. (..) 마음에 맞는 말을 찾느라 마음과 말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일이 거꾸로 마음이 거기 있음을 알게 하는 경험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 293p. 해설 中
(..) 미학자 R. G. 콜링우드는 이젠 거의 잊힌 고전 '예술의 원리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예술가가 필요한 이유는 어떤 공동체도 자신의 마음을 전부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는 실패한 표현은 '추'가 아니라 '악'이라고 덧붙였다. 남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악의 진정한 근원인데, 좋은 예술은 공동체를 제 마음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의식의 부패를 막는 '약'이라고 말이다.
- 297p. 해설 中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이 단편 소설집은 '돈과 이웃'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떼어 놓고 말할 수 없는 것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돈으로 골몰하고 돈으로 고통받으며 돈으로 만족한다. 전세 사기를 당해 원래 들어가기로 한 집을 포기하게 된 것이거나, 자기 부모에게 용돈을 줄 때 봉투도 없이 돈을 건네는 배우자의 행동을 신경 쓰는 일, 은근히 눈치를 주는 청소부에게 팁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끼어있는 선민의식, 누군가의 비극/환희를 목도하고도 순수하게 그것을 애도/축하하지 못하는 모순 같은 것들이야 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들이 느끼는 크고 작은 상념들일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가짜 희망을 말하는 작가가 가장 낮은 단계이고, 정직하게 절망하는 작가는 더 나은 단계이며, 가장 최고의 단계는 납득 가능한 희망을 제시하는 작가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김애란 작가는 가장 최고의 단계에 오른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집의 단편들은 하나 같이 절망에 놓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다. 그 크기는 다를지라도 모두 자신의 삶에 권태를 느낀다거나 심지어는 삶을 포기하려는 이도 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묘한 불쾌감이나 불편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감정이 이 글을 매끄럽지 않게, 도중에 있는 문장들에 정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 결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희망적이라기보다는 희망을 넌지시 제시한다. '나아졌다'기보다 '보지 못했던 길로 눈을 돌렸다'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 소설들에서 인상적인 소재 중 하나는 '침입'이다. 나의 일상적이고 편안을 느껴야 하는 공간으로의 타인의 침입. 위층에서 약속을 어기고 벌인 공사로 인한 소음도 침입이라고 할 수 있고, 과외로 찾은 학생의 집에 대한 묘사(특히나 장애를 가진 아이의 소변이 있는 화장실에 대한 묘사) 또한 자신의 침입이며, 나의 집에 누수 공사를 하러 들어온 외국인 여자나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 불쑥 들어와 나를 놀라게 하는 청소부도 일종의 침입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방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침입과 방문은 일종의 일상을 무너뜨리는 붕괴의 작용과도 같다. 이러한 붕괴로써 일어나는 현상은 나의 가치관의 붕괴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 속에서 올라오는 '이물감'이다. 현상에 대한 혐오가 결국 나에 대한 혐오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구토다. 그렇기 때문에 김애란의 글들은 매끄럽게 현상을 포장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나의 뒤통수를 찍도록 그대로 둔다. 돈과 이웃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 - 욕심, 증오, 혐오, 싫증 - 을 외면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렇다. 최근 서울에서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SNS에서 온갖 정보들과 전세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한 체크리스트, 청년주택 청약 사이트를 들락거리는 나에게 이 소설의 이야기들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인물들의 크고 작은 비극들은 나의 일이 아니었지만, 마치 그것이 나의 미래인 듯, 희극은 언제라도 비극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인 듯 느껴졌다. 집을 잃은 감정, 혹은 집으로 여겼던 사람을 잃은 감정 같은 것들은 가장 깊은 비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들이 말미에서 제시하는 길들은 해답의 아주 조그마한 흔적이다. 불쾌와 불편 속에서도 피어오르는 연민의 감정. 그 연민은 나에게로 향하는 건지, 세상을 향한 건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