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을 뺀, 그 지독하고 검은 각성제(1)

에머슨 콰르텟이 1998년 아스펜에서 추출해 낸 쇼스타코비치의 붉은 피

by 클래식덕후문쌤

Shostakovich String Quartet No. 8 in C Minor, Op. 110: I. Largo

https://www.youtube.com/watch?v=SHNP6NltBFg&list=PLs1oeJCZ4VmBTHkU8ST0wUoXLu8zCJuIA&index=28

- Emerson String Quartet

- 1998.7, 아스펜 해리스 콘서트홀



Episode.1


가끔은 음악이 위로가 아니라 통증으로 다가오길 바라는 날이 있습니다.


미지근한 물이나 부드러운 우유를 섞어 적당히 타협한 맛이 아니라,


혀뿌리가 아릴 만큼 지독하게 쓴


에스프레소 도피오(Double Espresso)를 단숨에 들이키고 싶은 그런 밤 말입니다.


세상이 건네는 어설픈 위로가 오히려 상처가 될 때,


저는 서슴없이 CD 장에서 노란색 로고가


선명한 도이치 그라모폰(DG)의 앨범 하나를 꺼내 듭니다.


바로 미국의 에머슨 현악 사중주단(Emerson String Quartet)이


2000년에 발표하여 그해 그래미를 휩쓸었던 쇼스타코비치 현악 사중주 전곡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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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2


총 5장의 CD로 묵직하게 구성된 이 박스 세트 중에서도,


저의 손때가 가장 많이 묻은 디스크는


단연 제8번 C단조(Op. 110)가 수록된 세 번째 장입니다.


이 음반이 그토록 특별한 이유는 스튜디오의 정제되고 인공적인 공기가 아닌,


1990년대 후반 미국 아스펜 뮤직 페스티벌의 뜨거운 현장을 담은


라이브 레코딩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8번이 연주되던 그날,


아스펜의 공기는 유독 건조하고 팽팽했던 모양입니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현의 울림에는 습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짝 마른 장작 같은 긴장감이 감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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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3


저는 이 트랙을 재생할 때마다 에머슨 콰르텟 멤버들이


무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머슨 콰르텟은 첼로를 제외한 제1,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 주자가


모두 기립해서 연주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고수합니다.


앉아서 연주할 때보다 훨씬 더 공격적인 보잉,


발을 구르듯 몰아치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가능한 이유입니다.


이 시각적인 긴장감은 청각적으로도 완벽하게 증명됩니다.


그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악보를 감상적으로 어루만지지 않습니다.


대신 해부학 교실의 의사처럼, 혹은 고압의 머신을 다루는 바리스타처럼 냉철하게 파고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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