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머슨 콰르텟이 1998년 아스펜에서 추출해 낸 쇼스타코비치의 붉은 피
Shostakovich: String Quartet No. 8 in C Minor, Op. 110: II. Allegro molto
https://www.youtube.com/watch?v=AuQghuj3Kfs&list=PLs1oeJCZ4VmBTHkU8ST0wUoXLu8zCJuIA&index=29
Episode.4
1악장 라르고(Largo)가 시작되면,
첼로의 데이비드 핀켈이 무겁고 굵은 톤으로 ‘DSCH’ 모티프를 긁어냅니다.
D(레)-Es(미 플랫)-C(도)-H(시).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이름 이니셜에서 따온 이 네 개의 음표는
첫 모금에 느껴지는 강렬한 쓴맛입니다.
1960년, 전쟁의 폐허가 된 드레스덴에서
체제의 압박과 감시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어 신음하던 작곡가는,
이 네 개의 음을 통해
“나 여기 살아있다. 나 쇼스타코비치가 여기 존재한다”
라고 끊임없이 되뇌었습니다.
Episode.5
러시아의 보로딘 콰르텟이 이 대목을 눈물 젖은 빵처럼 축축하고 처연하게 연주한다면,
에머슨 콰르텟은 수분을 완벽하게 제거한 원두 그 자체입니다.
아스펜 해리스 콘서트홀 특유의
투명하고 건조한 음향(Acoustics) 덕분에,
현과 활이 마찰하며 송진 가루가 날리는 소리까지 가감 없이 귀에 꽂힙니다.
그들은 감정을 섞어 묽게 만드는 대신 압력을 높입니다.
마치 에스프레소 머신이 9기압의 고압으로 원두의 에센스를 짜내듯,
쇼스타코비치의 고통을 물리적인 압력으로 치환해 우리 앞에 탁, 하고 내려놓습니다.
Shostakovich: String Quartet No. 8 in C Minor, Op. 110: III. Allegretto
https://www.youtube.com/watch?v=OE9kCKg-Chs&list=PLs1oeJCZ4VmBTHkU8ST0wUoXLu8zCJuIA&index=30
Episode.6
이 음반의 백미이자, 제가 수많은 쇼스타코비치 명반 중에서도
굳이 에머슨 콰르텟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2악장 알레그로 몰토(Allegro Molto)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야말로 ‘카페인 러시(Caffeine Rush)’가 폭발합니다.
에머슨 콰르텟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살인적인 템포로 2악장을 질주합니다.
보통의 연주자들이 이 대목에서
감정의 과잉으로 인해 박자가 흐트러지거나 소리가 뭉개지는 반면,
에머슨은 기계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앙상블을 보여줍니다.
그 완벽함은 소름이 돋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