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을 뺀, 그 지독하고 검은 각성제(3)

에머슨 콰르텟이 1998년 아스펜에서 추출해 낸 쇼스타코비치의 붉은 피

by 클래식덕후문쌤

Shostakovich: String Quartet No. 8 in C Minor, Op. 110: IV. Largo

https://www.youtube.com/watch?v=LvDb-TRDSI0&list=PLs1oeJCZ4VmBTHkU8ST0wUoXLu8zCJuIA&index=31



Episode.7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16분음표의 향연 속에서,

제1바이올린의 필립 세처와 유진 드러커의 활은

서로의 소리를 베어버릴 듯 날카롭게 교차합니다.

그것은 슬픔을 연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척추가 서늘해지는 ‘각성(Awakening)’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시스템이 개인을 옥죄어 올 때,

도망치는 자의 심박수는 공포 때문이 아니라 살기 위해 뜁니다.

1998년 아스펜의 무대 위에서 되살아난 그 심박수는

청자인 저에게도 전이되어, 듣는 내내 주먹을 꽉 쥐게 만듭니다.

Shostakovich: String Quartet No. 8 In C Minor, Op. 110: V. Largo

https://www.youtube.com/watch?v=Eo805uf3jec&list=PLs1oeJCZ4VmBTHkU8ST0wUoXLu8zCJuIA&index=32



Episode.8

이어지는 4악장, 그 유명한 ‘세 번의 강한 화음’이 터져 나올 때

에머슨의 활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아니라,

아예 닫힌 문짝을 부수고 들어오는 파열음처럼 들립니다.

그 충격음 뒤에 찾아오는 긴 적막.

관객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라이브 현장의 고요함 속에서

마지막 5악장이 시작됩니다.

격렬한 고압 추출이 끝나고 잔 바닥에 남은 커피 찌꺼기처럼,

음악은 쓸쓸하고 비릿하게 흩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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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9

쇼스타코비치는 드레스덴의 호텔 방에서 이 곡을 쓰며

가장 깊은 어둠을 응시했지만,

에머슨 콰르텟의 이토록 치열한 연주를 듣고 있으면

무기력한 절망보다는 강렬한 삶의 의지가 읽힙니다.

타협 없이 끝까지 밀어붙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단단한 뒷모습이랄까요.

그 쓴맛 뒤에는 기묘한 단맛, 즉 음악이 주는 긴 여운(Aftertaste)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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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10

이 앨범은 그래미 어워드 2관왕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저에게는 그저 잠들지 못하는 밤에 꺼내 드는 독한 각성제입니다.

오늘 밤, 세상이 건네는 매끄럽고 친절한 말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에머슨 콰르텟의 쇼스타코비치를 들어보세요.

그리고 기왕이면 설탕 없는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곁들이시길 바랍니다.

타협 없는 그 검은 액체와 에머슨 콰르텟의 날 선 현이,

당신의 무뎌진 감각을 다시 뜨겁게 깨울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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