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 월드컵 감상기 (3)

아시아 대륙 최초의 4강 신화를 이루어내다.

by 글쓰는 동안남

16강 전,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대전에서 펼쳐졌다. 당시, 이탈리아는 수비와 공격 및 피지컬 등 모든 영역에서 우리나라보다 월등했다. 하지만 수비의 핵심이었던 칸나바로와 네스타가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우리나라의 공격력이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웠다. 이탈리아와의 경기는 예전에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리가 아깝게 3:2로 패배했었다. (필자가 그 경기를 유튜브로 끝까지 시청했는데, 심판이 이탈리아를 살려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6년 뒤에 다시 경기를 갖게 되었다. 역시, 양 팀의 경기는 치열했다. 비에리의 헤더골을 시작으로 안정환 선수의 PK 실축과 설기현의 막판 극적인 동점골, 안정환의 반지 세리머니가 나온 헤더 골든골까지 하나하나 드라마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패배하며 가장 악몽스러운 월드컵 경기로 남아있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그 경기를 악몽으로 꼽고 있다. 우리에겐 8강이라는 대형 선물을 이탈리아를 통해 얻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8강에 진출했고, 월드컵 사상 유럽, 아프리카, 북미, 남미, 아시아 대륙이 모두 8강에 간 신화가 탄생되었다. 이러한 상승력으로 광주에서 강호 스페인과 격돌했다. 스페인은 우리에게 악몽과 기쁨을 모두 줬던 팀이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유럽의 5대 미드필더 중 하나였던 미첼에게 해트르릭을 허용하며 황보관의 캐논포 프리킥 하나에 그친 우리에게 3:1 패배를 안겼고, 1994년 미국 대회에서는 전국이 난리가 날 정도의 극적인 무승부를 거둔 국가였다. 8년 뒤, 다시 만나면서 과연 4강에 갈 수 있을지 주목되었다. 역시, 경기는 물고 물리고 치열하고 정말 악전고투 속에 승부차기까지 갔다. 결국, 호아킨이 실축을 하고 마지막 키커 홍명보가 성공시키며 4강이라는 또 다른 축배를 안게 되었다. 홍명보의 당시 지은 미소는 아직도 우리들의 마음에 남을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그만큼 기쁨이 컸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또 다른 기쁨과 기대를 안고 독일과 만나게 된다.


4강, 서울에서 독일과 경기를 갖게 되었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우리는 독일에게 아깝게 3:2로 패배하며 다시 한번 이변을 일으킬 준비가 되었었다. 하지만 칸의 선방과 수비력에 고전했고, 결국 미하엘 발락에게 골을 허용하면서 우리는 1:0으로 패배했다. 정말 잘 싸웠지만, 결국 독일에게 무릎을 꿇으며, 3.4위가 펼쳐지는 대구로 향하게 된다.


3, 4위 전에서는 역시 최대의 이변을 일으킨 팀, 튀르키예와 맞붙게 되었다. (당시, 터키로 불렸지만 현재 표기법으로 튀르키예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튀르키예팀에게 7:0 완패를 당했었다. 그래서 48년 만에 다시 경기를 갖게 되었다. 경기 내용은 11초 만에 하칸 수쿠르에게 골을 허용하고, 일한 만시즈에서 2골을 허용했고, 우리는 이을용과 송종국 선수가 1골씩 넣었지만 3:2로 패하며 최종 4위를 기록하게 된다. 당시, 튀르키예나 우리나라는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형제의 나라로써 서로 간의 우정과 친목을 다질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였던 것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승부로 우리의 2002년 월드컵은 마무리되었다.


최종 순위, 4위 아마 아시아대륙팀에서 이런 성적을 낼 팀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유는 그만큼 아시아 축구의 실력차가 아직 크기 때문이다. 그만큼 4위라는 성적은 우리에게 큰 선물이었던 것이다. 이를 말미암아 우리 축구 대표팀의 경쟁력은 급상승했고, 많은 선수들이 유럽 국가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의 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2002년 월드컵의 스타일을 거울삼아 경기를 준비하는 데 있어 많은 참고를 하고 있다. 그만큼 2002년 월드컵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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