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방에서 만났던 천둥신의 정체” https://brunch.co.kr/@314/9
위 글의 속편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아래의 글을 읽기 전, 1편에 해당하는 윗글이 좋은 에피타이저가 될 것이다.
밤샘 작업에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한낮에 깨니 4층 집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전화가 와 있었다. 드문 일이었다. 한 달 걸러 수도 계량기 지침을 알려 달라는 문자 메시지 외에는 거의 연락하지 않는 분이셨다.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전화를 걸었다.
“혹시 밤에 망치질하셨어요? 너무 시끄럽다는 얘기가 들려서…”
응? 이게 무슨 얘기지? 지금 내가 오밤중에 망치질이나 하는 몰상식한 인간인지를 물으시는 건가? 주변에 폐가 될까 봐 현관문 손잡이도 돌려서 조용히 닫는 내게 한밤중 망치질 혐의라니? 망치라면 옆집 토르신(Thor 神)이 있는데 왜 뜬금없이 내게?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질문이기에 나는 조곤조곤 말씀드렸다. 망치질 안 했다고. 한다 해도 아주 가끔 주말 낮에 전기드릴 쓰는 일은 있어도, 망치질할 일은 전혀 없다고. 요 며칠간 밤새웠는데, 망치 소리 같은 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그럼에도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살펴보겠다고.
처음으로 옆집 토르신을 대면했던 게 2년도 넘었는데, 이제야 다시금 망치 소리 이슈가 고개를 들 줄은 미처 몰랐다. 수수께끼 같은 찜찜한 통화를 마치고는 샤워하고 가볍게 요기한 후에 최근에 맛 들인 취미를 시작했다.
전기 포트에 물 500cc를 담아 끓이는 동안, 한 손에 잡히는 원통형 수동 커피 분쇄기를 전자저울에 올려 원두 20g을 담는다. 분쇄기 뚜껑을 덮고 손잡이를 약 80번 돌린다. 잘 갈린 커피 가루를 평평하게 다지는 레벨링(leveling; 평탄화)을 위해 분쇄기를 살살 돌려가며 통통 친다. 전자저울 위에 비커, 그 위에 깔때기처럼 생긴 드리퍼, 거름종이를 올리면 물이 다 끓는다. 끓은 물을 백조 목처럼 가는 주둥이가 달린 드립 포트에 옮겨 담고 여과지 위에서 원을 그리듯 물줄기를 부으며 린싱(rinsing; 헹굼)을 한다. 비커에 담긴 물을 버리고 다시 세팅 후 여과지 위에 분쇄된 원두를 담는다. 한가운데부터 원을 그리며 약 30g의 물을 붓고 약 30초 기다리는 동안, 분쇄기 숫돌에 묻은 원두 찌꺼기를 털어내기 위해 한 번 더 분쇄기를 살살 돌려가며 통통 치고 조립한다. 빵처럼 부풀어 뜸이 든 커피 가루 위에 다시 물줄기를 우아하게 원을 그리며 부어서 내리며 드립 커피 완성.
향긋한 커피가 한 모금 들어가니 이내 머리가 쨍해졌다. 과일 향과 시큼 쌉쌀한 맛을 음미하며 요 며칠 밤을 돌이켜 본다. 흠… 특별히 시끄러웠던 기억이 없는데… 아~ 주문했던 원두와 함께 사은품으로 디카페인 원두도 왔길래 밤에 맘 놓고 커피를 내려 마셔봤지. 밤 열 시? 열 한 시였나? 물 끓이고, 디카페인 원두를 갈아 땅·땅·땅…. 응? 땅·땅·땅?
헉! 제발…. 정말? 진짜? 나도 어쩔 수 없이 천둥 신 토르였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밤 특별히 시끄러웠다는 기억이 없었다는 게 되려 내가 범인이라는 반증이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자기 방귀는 냄새도 소리도 너무 익숙하거든. 고작 이 정도 갖고 주변에서 코 잡고 찡그리니 성날 수밖에. ‘우리 아이가 그럴 리 없어요!’라며 제 자식만 감싸고 도는 ‘어떤’ 부모도 이 함정에 빠져있는 것일까.
휘두르면 뚝배기도 깰만한 쇳덩이로 된 분쇄기를 “레벨링”한답시고 싱크대 스테인리스 개수대 모서리에 두들겨 댔으니…. 그것도 살살 돌려가며 열 번 넘게…. 이게 망치 소리 아니면 뭐로 들렸겠는가? 그 누가 ‘아~ 향기로운 드립 커피를 내리는 과정 중 하나인 레벨링 작업 소리였군요? 그거라면 무식한 망치질 소리와는 레벨이 다르죠!’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바로 집주인 어르신께 전화했다. 범인이 나였다고. (이해 못 하시겠지만) 커피를 내리면서 그런 소리를 냈다고. 죄송하다고. 이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커피숍을 떠올렸다. 에스프레소를 내린 후 포터필터를 땅땅 치며 커피 가루를 떨구는 장면이 기억나 바로 찾아봤다. 아~ 그걸 넉 박스(knock box)라고 부르는구나. 내게 적당한 걸로 바로 샀다. 고무로 코팅된 ‘넉 박스’를 왼손으로 들고 공중에서 분쇄기를 통통 치니 설거지하는 소리보다 조용했다.
커피를 즐기는 것마저 “세련된 착취”라고 읊조리는 루시드폴 님의 “사람이었네”라는 노래를 주위에 알리며 공정무역에 동참했던 적도, 동물애호가와 채식주의자에게 공감하며 육식을 멀리하던 시절도, 그렇다면 쌀과 풀은 생명 아니었냐며, 결국 우리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다른 생명을 죽이고 착취해야만 살 수 있는 최상위 포식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저 숨 쉬는 동안 폐를 덜 끼치며 살자는 다짐을 마음 바탕에 깔아 놓은 지 오래임에도, 2년여 전 옆집 망치의 신 토르와 대결하여 이겼던 내가 정작 ‘내로남불 끝판왕’이었다는 걸 보여준 이번 일은, 안 그래도 최근부터 숙어진 고개를 더 숙이게 하는 기회가 됐고, 이를 기념하여 표어를 하나 만들어 가슴속에 새겼다.
자나 깨나 불 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자나 깨나 나 조심. 샌 방귀도 다시 맡자.
2023-03-19 씀
이참에 다시 듣는 노래
루시드폴, “사람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