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문을 열자마자 계산대로 가서, 그새 잊어버릴까 계속 되뇌면서 왔던 질문을 후드득 내려놓았다. “음식물 쓰레기 종/량/기/선/불/형/교/통/카/드 있어요?” 점원 아가씨는 작은 통에 담겨 있던 카드를 꺼내 카지노 딜러처럼 테이블에 쫙 펼쳤다. 이게 음식물 쓰레기 종량기에도 사용할 수 있는지, 카드값은 얼마이고 충전은 어찌하는 것인지, 마치 미팅 자리에서 신상을 묻듯 질문을 쏟아냈고, 그녀도 자신의 폰으로 검색까지 해 가며 내 카드 선택, 구매과 충전을 도와줬다. 이렇게 나는 새롭게 이사 온 집 건물에 설치된 신문물을 뒤늦게야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고 믿었)다.
주방에 저울이 있고, 상했거나 건강에 해로운 음식이 아니라면 되도록 입에다 버리자(?)는 신념을 가진 1인 가구에서 나올만한 음식물 쓰레기가 얼마나 되겠는가. 제일 작은 1리터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도 못다 채워, 아까운 마음마저 담아 질끈 묶고 손가락에 걸어 좁은 골목길을 나가곤 했는데, 이젠 버리는 음식물의 무게만큼 정확히 차감한다는 게 이 얼마나 획기적인가. 이 기계를 개발하신 관계자분께 감사! 마침 이사 과정에 못 먹게 된 게 있어, 얼른 집에 올라가 가져오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일단 조금 전 산 카드부터 잘 먹히는지 확인하고픈 생각에 설레는 맘으로 종량기 앞에 섰다.
오른쪽에 “카드 넣는 곳”이라는 녹색 글씨와 큼지막한 화살표가 보였다. 카드를 넣으니 묵직한 은빛 솥뚜껑 같은 윗입술이 들리면서 입이 쩍 벌어지며 풍기는 녀석의 입 냄새는 상당했다. 이상 없이 잘 되는 걸 확인하고 카드를 빼려고 보니, 어라? 카드가 안 빠진다. 녀석은 내가 방금 충전한 현금 1만 원을 꽉 쥐고 안 놓아 주면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듯 입을 쩍 벌리고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것. 여기서부터 현대 문명 앞에 놓인 늦깎이 원시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버려서? 뭔가 무게를 실어야 하는 건가? 수중에는 떡 한 덩이도 없으니, 침이라도 뱉어야 하는 건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녀석의 은빛 윗입술을 닫으려 살포시 눌러 봤지만, 뭐라도 먹어야 인질을 놓아주겠다는 녀석의 의지는 꿈쩍도 안했다. 불을 뿜는 공룡처럼 벌어진 녀석의 입에서 올라오는 냄새와 녀석에게 사로잡힌 인질을 뒤로하고, 나는 얼른 집에 올라와 녀석의 먹이를 챙겨 다시 협상 장소로 갔다.
어라? 고새 녀석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묶였던 인질은 풀린 채 그 자리에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인질과 떡이 모두 준비된 나는 다시 그 인질을 다시 처넣고 쩍 벌어진 입에 ‘옜다, 먹어라!’ 하며 녀석이 원했던 먹이를 쏟아부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녀석은 마빡에 무게가 몇 그램이고 몇십 원짜리라는 표시만 할 뿐 여전히 입을 닫을 생각도 안 하는 것 아닌가. LED 불빛으로 반짝이는 마빡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려가 봐도, 배에 큼지막하게 적힌 사용 방법을 다시 읽어봐도 도저히 녀석의 입을 닫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사용설명 중 3번이 “결재 완료 후 카드 회수(맞춤법이 틀렸다, 결제가 맞다.)”고 4번이 “투입구 닫힌 후 배출량 표시…”인데, 그 어디에도 녀석의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이 안 쓰여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녀석의 입 냄새를 견디고 있어야 하나 생각하며 급기야 눈에 띄는 서비스센터 번호로 전화했다.
한참 주고받다가 들려오는 상담원의 말, “닫힘 버튼을 누르세요.” “네? 닫힘 버튼이 어디 있죠?” 나는 빠르게 눈알을 굴리며 다시금 녀석의 머리끝부터 훑어 내려갔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데요… 아! 여깃! 감사합니다~.” 큼지막한 녹색 화살표와 함께 적힌 “카드 넣는 곳”이라는 문구 바로 위에 병아리 눈곱만한 “닫힘”이라는 글씨가 그제야 눈에 띄었고, 딸깍 누르자마자 즉시 녀석은 입을 꾹 다물었다. 드디어 이 원시인이 불을 뿜는 먹깨비 공룡의 입을 즉시 다물게 할 수 있는 급소의 비밀을 전수, 한 단계 진화한 순간이었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진 아마추어 웹프로그래머 개발자로서, 사용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 데이터베이스와 프로그램의 알고리즘(백 엔드)부터, 사용자의 눈에 보이는 웹디자인과 사용자 인터페이스(프론트 엔드)까지 적지 않은 세월 고민해 왔다. 그럼에도 어느 훌륭한 창조주의 피조물인 이 공룡 다루는 법을 몰라 이토록 헤매며 전화 찬스까지 썼다는 것에 한편 부끄럽기도 하면서도, 다른 한편 이 공룡의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사용 설명서’는 반드시 개선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고객 지갑에서 돈을 빼가는 ‘결제 시스템’만큼은 고객이 홀린 듯이 순식간에 완료되도록 최선을 다해 설계하지만, 카드 전표 하나 인쇄하려면 한참을 살펴보고 몇 번을 클릭해 들어가야 하는 여느 인터넷 쇼핑몰처럼, 이 공룡의 창조주도 핵심 목표는 ‘카드를 꽉 쥐고 돈 차감하기’였을 것이다. 어쩌면 “닫힘” 버튼은 초기엔 설계조차 안 했을지 모른다. 무게 측정 직후 뚜껑은 자동으로 닫히고 자동으로 결제됐을 수 있다. 그래야 사용설명 중 3, 4번의 순서가 뒤바뀐 것, 설명서에 “닫힘” 버튼을 누르라는 내용이 없다는 것, 그리고 “닫힘” 버튼이 아주 나중에 끼워진 듯 아주 작게 붙어있는 것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된다. (여담으로, “닫힘”이 어색하다. “닫음”이 더 적절할 텐데...)
문득, 나 자신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어떻게 개발되었을까 돌이켜 봤다. 혹여 좋은 첫인상과 상대로부터 뭔가 뜯어낼 ‘결제 시스템’까지만 최선을 다해 가꾸고, 이후 부가서비스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게 새끼손톱만 한 단추로 숨겨 놓거나 아예 개발조차 하지 않아 온 건 아닐까. 그래서 내 첫인상에 혹하여 지갑만 탈탈 털리고 추가 서비스는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씁쓸한 마음으로 떠난 이들이 혹여나 있을까.
끝으로, 이 원시인의 진화와 함께 자아 성찰의 기회까지 주신 공룡의 창조주께 한마디 하겠다.
날 골탕 먹인 창조주 너 이 자식! 만들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꾸벅.
2024-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