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긍정 78/365
책 만큼 죽어가는 매체도 없지만, 책 만큼 끈질기게 살아남을 것 같은 매체도 없다. 책이라는 매체가 그렇게 끈질기게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텐데, 그중에서도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책을 통해 사람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읽고 나면 나 스스로가 바뀌는 책들이 있다. 그 주장과 목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나의 내면을 파고들고, 나의 정신과 공명을 일으키고, 결국엔 나의 생각에 미세한 주파수 변동을 주고야 마는 그런 책들이 있다. 그러한 작품을 만나는 것은 인생에서 마주할 수 있는 크나큰 행운이다.
2026년 1분기에도 그런 행운을 만난 것 같다. 데이비드 이글먼이 쓰고 김승욱이 번역한 '무의식은 나를 어떻게 설계하는가'이다. 1월 말부터 읽기 시작했고, 그저께 긍정 기록에서는 초콜릿처럼 꺼내 먹는 책이라고 말한 그 책이다. 이 책 덕분에 나는 나 스스로와 다른 사람 모두를 이전보다 훨씬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글먼의 개념 중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하위 에이전트'(Sub-agent)이다. 요새 AI 좀 쓴다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그 이름인데, 이글먼의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지난 2011년이다. 현대적 인공지능 맥락이 아니라, 인간의 뇌 활동에 대해 설명하는 맥락에서 이글먼은 '하위 에이전트'라는 개념어를 말한다.
이 하위 에이전트들은 의식 아래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특정 상황에서 에이전트들 사이에서는 경쟁이 벌어진다. 초콜릿 케이크를 눈 앞에 두고, 즉시보상 에이전트는 '당장 먹자'라고 판단하지만 장기보상 에이전트는 '살 쪄. 먹지 말자'라고 판단한다. 그중에서 어느 에이전트가 승기를 잡느냐에 따라 우리는 행동한다. 이때 의식은 에이전트를 감지하지 못한다. 의식이 하는 일은 그저 승리한 에이전트를 위해 자기합리화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 뿐이다. '요새 운동 좀 했잖아. 케이크 한 조각 정도는 먹어도 될 걸?'
이러한 '하위 에이전트' 개념 덕분에 나는 나 스스로의 모순적인 모습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다정하지만 때로는 신경질적이고, 때로는 활발하지만 때로는 침울하고, 언젠가는 사교적이지만 언젠가는 고립을 자처하는 나의 모습이 모두 '그럴 수 있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나라는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고민을 종종 하는데,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하위 에이전트라는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니, 그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더욱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의 심술궂은 언행을 보면, 지금 그 사람의 뇌에선 '심술이 에이전트'가 운전대를 쥐고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또 언젠가 '친절함 에이전트'가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는 상냥한 얼굴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그 사람의 특정한 에이전트를 특정한 시기에 맞닥뜨릴 뿐이다. 혹시 그 누군가가 나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그냥 '나쁜 에이전트한테 지배당했네' 하고 넘기고 있다.
이글먼의 이 책은 2026년 1분기를 열어주는 아주 반가운 작품이다. 만족스러운 독서의 시간을 보내고 있고, 나를 변화시켜주었기에 감사한 독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나와 같은 변화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1일 1긍정(인데 서평을 가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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