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세 개의 개선문과 레마르크의 소설『개선문』
파리는 어떤 도시로 기억되는가. 혁명과 자유, 예술의 도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 파리는 그렇게 오지 않았다. 파리는 먼저 문학의 문장으로 왔고, 그다음에야 역사와 사유의 이름을 얻었다.
도시는 하나의 이미지로 완성되지 않는다. 특히 파리는 그렇다. 이곳은 언제나 여러 겹의 기억이 겹쳐져 있는 도시다. 그래서 파리는 질문으로 남는다. 이곳은 승리를 기념하는 도시인가, 아니면 패배를 기억하는 도시인가. 혹은 그 둘을 동시에 껴안고 살아가는 도시인가.
<파리의 드골 공항 대합실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처음의 파리는 시였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에서 센 강은 흐르고, 사랑은 지나가고,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 리듬 속에서 파리는 이미 하나의 정서가 되었다.
소설 속의 파리도 마찬가지였다. 스탕달의 파리에서는 욕망이 계단처럼 오르내렸고, 위고의 파리에서는 성당과 거리가 윤리의 무대가 되었다. 프루스트에 이르러서는 사건이 사라지고 기억만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실제의 파리를 보기 전부터 이미 여러 번 이 도시에 도착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학은 파리를 하나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파리를 여러 개로 늘려놓았다. 그래서 실제의 파리는 낯설지 않았다.
버스 창 너머로 에펠탑이 아득히 보였고, 아래로 센 강이 흐르고, 강 위에는 다리들이 차례로 이어졌다.
그 풍경은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수많은 다리가 강을 건너듯, 도시는 늘 사람들의 일상을 먼저 건네고 있었다. 그래서 파리는 관광의 목적지가 아니라 흐름의 도시처럼 느껴졌다. 보는 도시가 아니라, 건너며 알게 되는 도시.
<버스 속에서 찍은 센강의 한 장면>
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개선문 앞이었다. 루브르 옆의 장식적인 개선문이 아니라, 샹젤리제가 정면으로 열리는 에투알 개선문이었다.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의 아치 지붕)
파리의 개선문 내부 아치를 아래에서 올려다본 장면이다. 아치 안쪽에 반복되는 정사각형 카소네(coffer) 천장은 고대 로마 건축 전통을 계승한 요소로, 구조적 안정과 함께 리듬감 있는 장엄함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제국과 국가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장치다.
아치 가장자리에는 전투와 승리를 상징하는 인물 부조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조각들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군사적 기억을 영웅 서사로 고정시키며, 개선문을 하나의 거대한 ‘돌의 역사서’로 만든다. 건축과 조각이 결합해 기억을 서사화하는 고전적 방식이 이 공간에 응축돼 있다.
또한 띠 장식에 반복되는 그리스식 메안더 문양은 질서와 영원을 상징하며, 이 기념물이 일시적 승리가 아닌 지속되는 국가 기억을 표상함을 드러낸다. 이 내부 시점은 외부의 위용보다 오히려, 개선문이 전쟁의 이름과 죽음을 감싸 안고 보존하는 기억의 구조물임을 조용히 증언한다.
이 불은 무명용사의 묘 위에서 타오르는 "영원의 불(La Flamme)"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으나 이름조차 남지 않은 병사를 기리기 위해
1921년 무명용사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었고,
1923년부터 불이 점화된 이후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
파리 에투알 개선문 아래에는 여행자들이 쉽게 지나치는 청동 현판이 설치되어 있다. 이 현판은 플라크 코메모하티브(plaque commémorative)라 불리는 추모 장치다. 1940년 6월 18일,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한 직후의 역사적 순간을 기념한다. 당시 프랑스 정부가 휴전을 선택한 상황에서, 런던으로 망명해 있던 샤를 드골은 BBC 라디오를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연설을 발표했다. 이 연설은 ‘6·18 호소(Appel du 18 Juin)’로 불리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자유 프랑스 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이 현판이 상징적인 이유는 그 위치에 있다. 프랑스는 이 중요한 선언을 개선문의 벽면이나 기념비적 공간이 아닌, 사람들이 실제로 밟고 지나가는 바닥에 새겼다. 이는 승리의 영광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의 순간 또한 역사로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개선문이 본래 전쟁의 승리를 기리는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바닥에 새겨진 이 청동판은 프랑스가 선택한 기억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 한국전에 참전한 병사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추모 명판>
이국만리 한국전쟁에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프랑스 병사들의 희생에 숙연해졌다. 자유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다가왔다.
광장 한가운데 서자 도시는 구조를 드러냈다. 차들은 원을 그리며 흐르고, 시야는 사방으로 열렸다. 승리를 기념하는 문 앞에서 나는 오히려 경계에 서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 순간, 오래전에 읽었던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이 떠올랐다.
줄거리는 또렷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공이 자주 마시던 술이름은 분명했다. '칼바도스!!!' 고등학교 시절에 이 소설을 읽었는데, '칼바도스'는 도대체 어떤 맛일까? 궁금하게 생각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개선문은 전쟁의 승패를 다루는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삶에서 밀려난 사람들, 국적과 서류를 잃은 인간들이 어떻게 하루를 견디는지를 그린다. 파리는 그들에게 피난처이지만, 결코 정착지가 되지 않는다. 관용은 존재하지만 조건부이며, 보호는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주인공 라비크는 독일에서 탈출한 외과의사로, 파리에서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그는 낮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숨고, 밤에만 다른 의사의 이름을 빌려 수술을 한다. 사랑은 잠시 그를 붙잡지만, 그마저도 전쟁과 추방의 현실 앞에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개인의 선택은 늘 역사에 의해 압도된다.
이 작품에서 유독 또렷하게 남는 것은 사건보다 술의 이름이다. 라비크가 마시는 술은 칼바도스다. 샴페인도, 코냑도 아닌 이 거친 사과 증류주는 축하의 술이 아니라 버티기 위한 술이다. 달콤하지만 차갑고, 따뜻해질 것 같지만 끝내 그러지 않는 이 술은 망명자의 밤과 정확히 닮아 있다.
그래서 『개선문』의 개선문은 통과의 문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영광과 개인의 상실이 교차하는 자리이며, 살아남았지만 돌아갈 곳 없는 인간들에게는 닫힌 문이다. 줄거리는 흐려져도 칼바도스의 이름이 남는 이유는, 이 소설이 이야기보다 감각과 상태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전쟁의 서사가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으려 했던 시간의 기록이다.
파리에는 개선문이 세 개 있다. 루브르 옆의 카루젤 개선문, 샹젤리제 끝의 에투알 개선문, 그리고 라 데팡스의 현대적인 개선문.
이 세 개의 문은 단순히 크기만 다른 것이 아니다.
<루부르 박물관 옆 카루젤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
카루젤 개선문은 파리 루브르 궁전 앞, 튈르리 정원 입구에 세워진 비교적 작은 규모의 개선문이다.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상대로 거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을 명령했고, 1808년에 완공되었다.
<이탈리아 수도 로마의 콜로세움 옆 개선문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서 세운 개선문이다. 필자는 이 개선문을 보기 위하여 프랑스 여행 4년 이후에 여길 다녀왔다.>
이 개선문은 프랑스적 창작이라기보다 로마 제국의 전통을 의도적으로 계승한 건축물이다. 나폴레옹은 로마에 남아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을 본떠 카루젤 개선문을 설계하게 했다. 실제로 구조와 비례, 장식 방식이 고대 로마의 삼문(三門) 개선문과 매우 흡사하다. 중앙 아치 하나와 양쪽의 작은 아치 두 개로 구성된 형태는 ‘정복자의 통과’를 상징하는 고전적 양식이다.
상단에는 원래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에서 가져온 청동 말 네 마리(콰드리가)가 얹혀 있었다. 이는 전쟁의 전리품이었으며, 나폴레옹이 자신을 로마 황제의 계승자로 연출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폴레옹 몰락 이후 이 말들은 베네치아로 반환되었고, 현재 카루젤 개선문 위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상젤리제 거리의 끝에 있는 엘투알 개선문>
카루젤 개선문이 지닌 의미는 ‘위대한 제국의 서막’에 가깝다. 이 개선문은 도시의 중심 축을 장악하기 위한 실험적 기념비였고, 나폴레옹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루브르 앞의 이 개선문이 너무 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바로 샹젤리제 서쪽 끝에 세워진 에투알 개선문(Arc de Triomphe) 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은 자신이 구상한 가장 거대한 개선문을 생전에 통과하지 못했다. 카루젤 개선문은 살아 있는 황제를 위한 개선문이었고, 에투알 개선문은 결국 죽은 황제의 관이 지나간 문이 되었다. 이 대비 속에서 카루젤 개선문은 나폴레옹의 야망이 아직 현실과 맞닿아 있던 시기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카루젤 개선문은 거대한 에투알 개선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용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파리의 세 개선문 가운데 가장 로마적이며 가장 제국적인 기억을 품은 장소다. 루브르의 예술과 튈르리의 정원을 마주하며 서 있는 이 작은 개선문은, 프랑스가 한때 꿈꾸었던 ‘새로운 로마’의 출발점이었다.
카루젤은 로마를 꿈꾸던 제국의 모방이고, 에투알은 야망이 과잉된 제국의 선언이며, 라 데팡스의 개선문은 승리 대신 비워 둔 현대의 추상이다.
라데팡스의 개선문(La Grande Arche de la Défense)
라데팡스 개선문은 파리 서쪽 신도시 라데팡스(La Défense)에 세워진 현대적 기념물이다. 정식 명칭은 그랑드 아르슈(Grande Arche)로,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완공되었다. 고대와 근대를 기념하던 기존의 개선문들과 달리, 이 건축물은 현대 프랑스가 스스로에게 바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상징한다.
이 건축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인권과 인간 존엄을 기념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라데팡스 개선문은 “인류의 개선문(Arche de la Fraternité)”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으며, 군사적 영광 대신 자유·평등·박애라는 계몽주의적 이상을 공간으로 번역한 건축물이다.
형태 또한 상징적이다. 고대 로마의 개선문이 ‘통과해야 할 문’이었다면, 라데팡스의 개선문은 비워진 정사각형의 틀이다. 내부가 비어 있는 이 구조는 특정 인물이나 제국을 기리는 대신, 열려 있는 미래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가치를 암시한다. 이는 완결된 승리보다 ‘계속 질문해야 할 인간의 과제’를 말하는 건축적 선언이다.
이 개선문은 파리의 역사적 중심축인 '아르크 드 트리옹프 축(Axe historique)'의 연장선상에 있다. 동쪽의 카루젤 개선문, 중앙의 샹젤리제 에투알 개선문, 그리고 서쪽 끝의 라데팡스 개선문이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이 축을 따라가면, 프랑스의 기억은 제국의 야망 → 국민국가의 영광 →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이동한다.
라데팡스 개선문이 세워진 위치 또한 의미심장하다. 주변은 관공서, 대기업 본사, 금융기관이 밀집한 업무지구다. 이는 이상이 박물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노동과 경제, 제도의 한가운데서 실천되어야 함을 암묵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라데팡스의 개선문은 웅장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차갑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거리감 속에서, 이 건축은 질문을 던진다.
“이 시대의 개선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기념할 자격이 있는가?”
파리의 세 개선문 가운데, 라데팡스의 개선문은 가장 말이 없지만 가장 철학적인 기념비다. 과거를 찬양하지 않고, 현재를 단정하지 않으며, 다만 인간이 도달해야 할 방향을 조용히 가리킨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에서 이 상징은 다시 뒤집힌다. 이 소설에서 개선문은 승리의 상징이 아니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은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승리와 영광의 기념물이라기보다,
국적 없는 자들이 통과할 수 없는 문
살아남았지만 돌아갈 곳 없는 인간들의 아이러니
국가의 영광과 개인의 파멸이 교차하는 장소
로 기능한다.
여기서 '똘레랑스'는 따뜻한 관용이 아니라 위험이 현실이 되기 전까지만 허용되는 조건부 윤리로 드러난다. 아무도 고발하지 않지만 아무도 지켜 주지 않는 시간. 그 침묵 속에서 관용은 미덕이 아니라 한계가 된다.
그날, 나는 개선문 아래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고, 그 누구도 승리를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한국전에 참전한 병사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청동 현판 앞에 서 있었다. 영광의 언어는 없었다. 이름과 연대, 그리고 죽음이라는 사실만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프랑스의 한복판에서, 프랑스의 전쟁이 아닌 타인의 전쟁이 이렇게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 오래 마음을 붙잡았다. 국가는 기념비를 세우지만, 전쟁은 언제나 개인의 삶을 먼저 데려간다. 그리고 관용이란 말로 선언되는 가치가 아니라 기억에서 배제하지 않으려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통과하지 않고, 설명하지도 않은 채.
개선문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나에게 그것은 통과하지 못한 삶들을 기억하게 하는 문이었다.
그래서 파리는 떠난 뒤에 시작된다. 개선문은 여전히 서 있고, 나는 그 아래에서 배운 태도를 가져왔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배제하지 않는 힘, 그날 그 자리에서 배운 똘레랑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