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고, 생각하자!
지은이: 알랭 드 보통
옮긴이: 공경희
도서출판: 은행나무
(P8) 상대의 짙은 눈빛이나 세련된 정신세계 때문이 아니라 저녁내내 혼자 일기수첩이나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서 연애를 하려고 하는 것은 낭만적인 사랑 개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자기 문제를 홀로 직시하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끌어들이는 것보다 더 혐오스런 일이 있을까? 하지만 보람도 없이 지치도록 탐색한 끝에, 상상력을 길러주는 존재와 주택 대출금 부담을 함께 짊어지기로 한다면 그것은 용서(적어도 이해)받을 만한 일이다.
(P23)관계를 맺는다는 건 상상하고는 다르리란 말을 하는 거라구. 그건 힘든 일이야. 기저귀를 갈아채우고, 가계부를 맞추고, 두 사람 다 고단하고 짜증날 때도 감수해야 하고. 거기에 매혹 따위는 없어. 남녀가 관계 맺는 게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키스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면, 꿈이나 꿔
(P49)'난 불행해'라는 생각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익한 활동'이라는 생각으로 확장되기란 어찌나 쉬운지.'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경박한 불평이 '사랑은 환상'이라는 우아한 경구로 승화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흥미로운 점은 존재와 사랑이 무익하냐 아니냐가 아니라[일개 인간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는가?],어떻게 본래의 촉매제는 사라지고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좌우명만 남느냐 하는 것이다.
(P61)점성술이나 그 밖에 개인의 운명을 예언하는 방법들이 오래전부터 인기 있었던 것을 보면, 이해받고픈 욕구가 사람을 과연 정확히 이해할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덮어버린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에릭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면 쉽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기를 알아준다고 믿고 싶어하고, 자신에 대한 권위적인 설명을 들으면 녹아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P62)유혹을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렵다. 너무 빨리 넘어가면 헤퍼보일수 있고, 너무 미적대면 상대가 흥미를 잃을수도 있다. 앨리스는 자존심을 구길 위험을 무릅쓰고, 집에 가서 이야기나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다시는 못 만날 위험을 감수하면서 예의 바르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까?
(P74)앨리스가 지금 에릭을 [신중하게 말해서]사랑하는 것일 리가 없다면, 그녀는 아마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이 동어 반복적인 묘한 감정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친 사랑이다. 감정을 자아내는 애정의 대상보다는 감정적인 열정에서 더 많은 쾌감을 도출하는 것을 뜻한다.
(P91)멜템에서 첫 코스가 끝날 즈음, 앨리스는 지금 행복한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가봐야 할 그곳'에서 식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가봐야 할 그곳'에 있고 싶다는게 무슨 뜻일까? 다른 사람들이 바로 거기라고 정한 곳에 가고 싶다는 것. 그것은 중심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고, 그래서 의심할 나위 없이 중요한 가치의 중심에 있고 싶다는 갈망.
(P95) 앨리스 자신은 가난해서 이탈리아제 구두와 수제품 정장을 입는 남자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지만-남자는 많은 찬미자 중에서도 그녀를 선택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갈망하는 남자가 바로 그녀를 원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허약한 자존감을 붙들어주었다.
(P103)앨리스가 이런 글을 좋아하는 것은 그녀의 심리 구조에 우연히 나타난 일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의문이 반영된 일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싶은지 확신하지 못했고, 자연히 외부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카디건을 사려고 한 것은 혼란스러운 자신을 기왕에 존재하는 스타일에 맞추려 한 시도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상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 했다. 그것은 고상하고 돈이 많이드는 흉내 내기였고,잠재적으로 무한한 특성을 몇 가지 핵심사조로 축소하는 일있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형태에 안주할 수 있었으니까.
(P143)그 남자는 돈에 관한 한 인심이 후했다-반지는 결코 싸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의 처신은 감정적으로 너그럽지 않았다. 그것은 앨리스츼 5파운드짜리 치즈에 대한 빚을 갚으려는 인색한 시도였다. 에릭이 더 큰 선물을 주려는 것은 선물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감사하는 위치에 서면 자율성을 잃고 간섭 받게 되는 것을 싫어해서이기도 했다.
(P176)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상대가 당신과 같이 있으면 정말 편안하다고 말해도, 대꾸도 없이 TV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바꿀 수 있는 쪽에 힘이 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게 많은 사람에게 힘 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
(P276)앨리스가 여덟 살이나 적다는 사실 때문에 에릭이 불편한 적은 없었다. 사실 그 남자는 늘 어린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남자 친구들 사이에서 도둑놈 소리를 들었다. 이른바 '나긋나긋한 몸매'도 좋았지만, 어린 여자들은 그 남자의 어떤 면을 세월이 자연스럽게 가져다주는 게 아닌 그 남자만의 장점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단지 지상에 한 10년 더 살았기 때문에 얻어진 서른한 살의 성숙함은, 어린 남자들의 서투름만 봐온 스물네 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P294)몇 주 사이에 원래 색으로 돌아가는 피부를 보면서 그녀는 오랜 진실을 깨달았다. 애인과 결혼하려고 아내를 버린 남자는 새 애인을 찾고 만다는것-또 낙원을 찾아 카리브 해의 섬으로 날아간 사람은 불가피하게 햇빛과 바다에 실망하고는 그 실망을 가라앉히느라 마음속으로 또 다른 낙원을 찾는다는 것을
(P298)누구와 사귈 때, 사람만 달랑 올 수가 없다-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문화가 따라오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관습이 따라온다. 특정한 지역성이라고 할수 있는 요소가 함께 온다. 이러한 성향은 민족성으로만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계층과 지역과 집안의 특성이 뒤섞여 구성된다. 본인은 이 무의식적인 요소들의 집합을 정상 상태로 여긴다.....두 사람의 관계에서 점차 뚜렷해지는 게 있었다. 앨리스는 에릭이 두 사람의 차이를 교묘하게 그녀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을 차츰 알아차렸다. 그 남자의 지역성에는 정상의 표준 개념이 확고해서, 극장에 가는 것이나 음식, 색깔에 대한 취향, 선호하는 예법이 다를 경우 앨리스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P314)앨리스는 자신이 단일한 사람이 아님을 상기했다. 내력과 생활 방식이 같은 복제 인간 수백 명이 런던, 파리나 뉴욕을 돌아다닌다는 뜻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에 따라서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그중 어떤 모습은 다른 경우보다 더 낫고 더 그녀답기도 했다.
(P318)비트겐슈타인(오스트리아 태생인 영국 철학자)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리는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 있는 사람이 된다. 그들의 너그러움이 우리를 너그럽게 하고, 그들의 모순이 우리를 모순되게 한다.
(P352)이런 만남은 순수해 보이지만,복잡한 문제가 깔려 있었다. 앨리스는 왜 애인에 대해 불평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그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둘 사이가 좋지 않게 되어간다는 뜻히고,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그녀는 조만간 더 잘 지낼 사람을 찾게 될 터였다. 그런 경우, 여기서 필립은 어떤 역할을 할까? 왜 그 남자는 괴로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 겸 상담사로 선택되었을까?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서? 아니면 환자 쪽에서 친한 관계 이상으로 진전되기를 바라서? 엘리스가 에릭에 대한 불만을 늘어 놓은 것은, 필립의 관심이 싫지 않다는 의중을 밝히려 함일까? 아니면 그녀에게는 점심시간의 만남이, 기본적으로는 행복한 관계에서 가끔 일어나는 짜증을 해소할수 있는 기회을 뿐인가?
(P375)사람들을 끊임없이 봐도, 새로운 인상이 생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새로운 인상을 받기보다는 편견을 확인하는게 고작이다. 우리는 겨우 몇 단계로만 사람을 그린다-첫 만남에서,오래 안 만난 후에, 야단법석 중에,병을 앓은 후에, 그런 때에 비로소 게으른 시각을 일깨우는 뭔가가 생긴다.
(P383) 앨리스는 자신의 모자란 점을 채우고자 사랑했고,그녀가 갈망했지만 부족했던 자질을 상대에게서 추구했다. 그녀의 감정적인 욕구는, 상대가 가져다준 조각 없이는 불완전한 퍼즐 같았다. 하지만 스스로 발전하면서 빈 공간은 변하고, 열다섯 살에는 딱 맞았던 조각이 서른 살 때는 필요치 않게 된다. 빈 자리는 윤곽을 다시 그렸고, 퍼즐-사람이 그에 맞춰 변하지 않으면, 그녀는 헤어지거나 곤란을 무릅쓰고 결론을 끌어내고자 했다.
(P385)에릭이 줄수 있는 것이 더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런던의 레스토랑을 훤히 아는것, 우아한 아파트, 사회의 사다리에서 굳건한 지위를 차지한것, 이런 것들은 그녀도 얻을 수 있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직장에서 성공한 것은, 그녀를 웃게하거나 친절한 행동으로 놀라게 하는 능력에 비하면 부차적인 요소였다....에릭의 심리적인 경박함도 그와는 다르지만 강하게 진을 뺐다.
(P391) 그녀는 이제 자신이 정말 에릭을 그리워한다고는 믿을수 없었다. 상실감이 컸지만 그 대상이 에릭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사랑을 시작한 장본인은 에릭이었지만 그 남자는 사랑에 걸맞게 살지 않았다. 그녀는 기대 속에서 상상했을 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해 기묘하게 향수를 느꼈다. 누군가 그리웠지만, 기억속을 헤매자니 솔직히 이제는 상실감의 원인을 에릭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섬세함과 노골적인 솔직함으로 가득차 있는 책이다.
주인공들이 1초안에 생각해내는 동시다발적인 5~6가지의 생각과 감정을 파악해서 슬로모션을 걸어두고,
그것들을 실타래처럼 뽑아낸후 글로 정리 한 것 같다.
글을 쓴다는것, 글을 쓸줄 안다는 건....이런 거구나.
생각이나 아이디어는 머리속에 있지만 말로 표현할줄 아는 사람(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 교양있게 말하는 방법, 정리해서 말할줄 아는것, 상황에 맞게 말하는 것...모든 말하는 재주들...)은 극히 한정적인 것처럼,
한번쯤은 느껴봤을 이런 감정과 고민을 글로 표현할줄 안다는게 부럽고, 놀라웠다.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분석할수 있을까?
감정을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관찰할수 있을까?
엄청 솔직하게 쓴 일기장을 보고 있는 것처럼 한줄 한줄이 날카롭다.
연애에 관한, 사랑에 관한 감정을 의심해 본적이 있거나...
내가 사랑하는게 정말 그 사람일까? 고민중이거나...
사랑을 하는 이유가 뭘까...
이런 답 없지만 중요한 고민을 해본 사람이라면 꼭 읽어봤으면 한다.
내가 사랑한건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나 자신이었다.
그러니 내가 잃은건 그 사람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