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의 '시'가 사라진 시대

시여, 침을 뱉어라-김수영의 글을 읽고

by Jaepil


방학이 시작되고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민방위 훈련을 하는 소리였다. 15분가량 울렸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한 울림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에 반응하는 것은 단지 개미일 뿐 사람들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다들 노트북으로 일을 하거나, 책을 펴서 공부에 몰두한 채 요지부동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쳐다보고 있는 화자에게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안전불감증'이라는 말이 미디어에서 사용하는 언어이지 실제로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일은 단순히 사람들의 무감각이 문제인 것은 아닐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이기도 하고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손색이 없는 상태라 민방위 훈련은 중요하고 1972년부터 실시된 이후 국가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국민의 안전을 우선시하기 위해 실시된 제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대 이후까지 민방위 훈련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평안을 깨는 울림이 어느새 배경음악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우리가 위험을 인식하는 내면의 감각이 둔화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참으로 평안하고 비둘기가 산책을 갈 정도로 하루하루가 아무런 일이 없는 날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명언처럼 겉으로는 별일 없어 보이지만 시끄러운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용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일까? 사람들은 어느 날 주저앉은 모습이 종종 발견된다. 예컨대 뉴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청년들의 ‘쉬었음’이라는 통계 수치가 그렇다. 일하지도, 공부하지도 않는 상태로 분류된 숫자들은 어느새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더불어 과거 초등학교 교실에서 장래희망을 묻던 질문에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자연스럽게 불리던 시절과 달리, 2000년대 이후 아이들의 입에서 유튜버나 건물주가 흘러나오는 장면 역시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만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까? 필자는 단순히 무감각의 영향이 사회문제에 극한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시라는 문학의 한 장르에서도 두드러진다고 느낀다.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 중에도 문학박사가 있을 수 있고, 글을 쓰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SNS와 서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들을 읽으며 느끼는 인상들을 말하고자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 저항의 글이자 자기 성찰을 하고 있는 시인의 예를 들어보자 대표적인 시인이 윤동주이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이처럼 시라는 것은 시대를 관통하여 비록 짧은 글이지만 묵직한 무게감으로 독자들에게 스스로를 거울을 보듯 사유할 수 있도록 했다. 나아가 김수영의 시처럼 급진적인 언어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주기도 하였다.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푸른 하늘을>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최근 필자는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를 읽고 있다. 분량은 길지 않지만, 읽는 내내 잔소리처럼 느껴지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 잔소리는 흔히 말하듯 귓등으로 흘려버릴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오늘날 많은 시들에서 도전적이거나 갈급한 태도가 잘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곱씹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편안해지고 안락해질수록 문학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과거의 시인들이 보여주었던 절박함과 긴장감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곧 ‘배고픔의 언어’가 함께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다. 이미 고(故) 이어령이 말했듯, 우리는 ‘폭력의 시대’를 지나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공감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날카로운 질문들이 시를 통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현실은, 글을 쓰는 화자로서 매우 애석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