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놈의 드라이브

by 이로

가을이었다.

에어컨 바람에 지쳐 축 늘어졌던 피부가 드디어 숨통을 트는 계절.

단풍 구경 가자며 호들갑 떠는 친구들의 재촉을 뒤로하고 나는 혼자 차에 몸을 실었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다. 으레 그렇듯, 갈 곳 없는 허무함이 내비게이션 화면처럼 깜빡였다.


차창 밖 풍경은 시시각각 변했다.

저마다 다른 색깔을 뽐내는 단풍잎들은 마치 오늘이 마지막 쇼인 양, 온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붉고 노랗고, 또 주황빛으로 타오르는 잎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좀 얄미웠다.

저렇게 뜨겁게 불타는 것이, 꼭 잘난 척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야, 너희는 그렇게 뜨거워서 좋겠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생은 한 방이라고 외치는 욜로족이 저 단풍잎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닐까 싶었다.

흔들리는 물결, 흔들리는 나.


어쩌다 보니 이름 모를 호수 근처에 닿았다.

차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훅 밀려 들어왔다.

호수는 잔잔했다.

물속에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비늘들, 그들의 움직임은 평화로웠다.

마치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듯, 그저 현재에 충실한 존재들처럼 보였다.

걔네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내고 있는 걸까? 아니, 물고기가 뭘 안다고.


나는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물속을 들여다봤다.

문득, 내 인생도 저 물고기들처럼 흐르는 대로 살면 좀 편할까 싶었다.

지금 직장은 언제까지 다닐 거냐, 뭐 먹고살 거냐, 미래는 어떻게 할 거냐….

걱정의 폭격에 시달리다 보면 내가 물고기인지 사람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 보면, 정작 지금 이 순간의 시야는 흐릿해지기 일쑤였다.

사는 게 뭐라고 이리 복잡한지.

어차피 될 대로 되겠지 싶다가도 막막함에 숨이 턱 막혔다.


흐르는 구름의 제안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데, 뺨을 스치는 바람이 다시 한번 하고 지나갔다.

시원했지만, 어딘가 쓸쓸한 기분도 들었다.

'야, 너 왜 그렇게 쫄아 있어?'

바람이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마음이 말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머리 위로 흐르던 구름 한 조각이 문득 내 시야에 들어왔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을 올려다보자, 녀석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같이 흘러 볼래?'

순간, 나는 미칠 듯이 뛰쳐나가고 싶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저 구름처럼, 바람처럼, 단풍잎처럼, 그저 오늘만 살아가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다.

내일 걱정, 모레 걱정 다 던져버리고 지금 이 순간만을 온전히 느끼며 살고 싶었다.

그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마치 홀린 듯 그런 충동에 사로잡혔다.


마지막 잎새, 마지막 오늘

나는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번에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아까보다 훨씬 시원하게 느껴졌다.

단풍잎들은 여전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호수 위 물고기들은 여전히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녀석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을 살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가장 뜨거운 지금'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주어진 오늘이, 내게 남은 가장 뜨거운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물론 내일도 해는 뜰 거고, 모레도 세상은 그대로일 거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나도 저 단풍잎들처럼, 물고기들처럼, 진심으로 살아내야겠다는 생각.


액셀을 밟았다. 엔진의 으르렁거림이 점점 높아졌다.

차는 기다렸다는 듯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속도계 바늘이 거침없이 솟구쳤다.

귓가에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휘몰아쳤다.

내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힘껏 뛰고 있었다.

목적지는 여전히 없었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어디로 가든, 오늘은 내가 가장 뜨겁게 불태울 하루니까.

그렇게 나는 내 식대로 드라이브를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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