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의 대화

#020

by 이로

방금 내 이름이 내 머릿속에서 도망쳤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앞에 앉은 이 예쁜 여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입을 열어보려 했지만 혀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할 말이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머릿속은 방금 도배를 끝낸 빈방처럼 하얗고 텅 비어버렸습니다.


여자는 내 당황한 눈빛을 읽은 듯 잔잔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그녀는 내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당신이 잊어도 내가 전부 담아두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했습니다.

그 온기가 내 혈관을 타고 들어와 얼어붙은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이름 모를 카페의 커피 향기. 비가 오던 날,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걷던 좁은 골목길. 결혼식 날 내가 긴장해서 엉뚱한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던 실수까지.

그녀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는 기억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안심했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여자를 사랑했다는 사실만큼은 본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나는 침묵했지만, 그녀의 사랑이 내 텅 빈 공간을 가득 메워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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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푸른 유니폼을 입은 보호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고 있던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습니다.

"박순자 할머니, 여기서 또 남의 남편 붙잡고 뭐 하세요?"

여자는 깜짝 놀라며 손을 뗐습니다.

그러고는 아주 맑은 눈으로 보호사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니, 우리 남편이 길을 잃은 것 같아서 내가 옛날이야기를 좀 해줬지."

보호사가 나를 보며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습니다.

"할머니, 이 할아버지는 오늘 처음 입원하신 분이에요. 할머니 남편분은 5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여자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수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머, 그랬나? 그래도 이 양반, 내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나를 정말 사랑해 주는 표정이었어.

그거면 된 거지, 뭐."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습니다.

나는 여전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온기 덕분에, 텅 빈 내 머릿속에 아주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난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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