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매점

#021

by 이로



내 고등학교 성적표에 찍힌 숫자는 늘 잔인했다.

등수는 뒤에서 세는 게 훨씬 빨랐고, 교실 안에서 내 자리는 지워진 존재나 다름없었다.

지옥 같은 교실에서 탈출하고 싶어 발버둥 칠 때마다, 나는 복도 끝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


그곳은 기묘하게도 나에게만 허락된 장소였다.

깔깔거리며 복도를 지나치는 평범한 아이들의 눈에는 그저 텅 빈 벽일 뿐이었지만,

자신의 현재를 온통 부정하며 '영혼이라도 팔아 치우겠다'라는 절망의 주파수를 내뿜는 나에게만 그 낡은 문은 삐걱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아저씨는 늘 검은 안경을 쓴 채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미래를 팔고 과거를 사는 상인이자, 당장 눈앞의 성과를 위해 자신의 수명을 깎아 먹기로 결단한 자만을 상대하는 파멸의 전당포 주인이었다.


"이번엔 뭘 바꿀 거니?" 아저씨가 물었다.

나는 땀에 젖은 낡은 시험지를 내밀었다.

수학 문제 하나를 맞히는 대가로 내 어린 시절 소중한 기억 한 조각을 건넸다.

영단어 하나를 외우는 대신 내 웃음소리를 팔았다.

그것은 외부에서 온 기적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누려야 할 시간의 총량을 미리 당겨쓰는 뒤틀린 교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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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확실했다.

꼴찌였던 내 성적은 수직으로 상승했다. 나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문대에 합격했고, 그날 이후 내 삶은 성공한 어른의 궤도에 진입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성공의 정점에 선 오늘, 나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모교를 다시 찾았다.

내 인생을 바꿔준 그 신비로운 매점을 찾아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 문은 없었다.

대신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거울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다.

순간 깨달았다. 매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욕망에 눈이 먼 내가 거울 앞에 서서, 늙어버린 미래의 나와 나눈 저주받은 거래였음을.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곳에는 탐욕스러운 눈을 한 채 주름이 가득 팬 노인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저씨가 팔았던 것은 화려한 미래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누려야 했을, 평범하고 소중한 '미래의 시간' 그 자체를 앗아간 것이었다.

내 손에는 여전히 빛나는 1등급 성적표가 들려 있었지만, 거울 속 노인의 시계는 이미 멈춰가고 있었다.

내게 남은 생은 단 하루뿐이었다.


화려한 외제 차 시트에 몸을 묻었지만, 백미러에 비친 내 모습은 여전히 검버섯이 핀 노인이었다.

나는 내가 팔아치운 것들을 복구하려 애썼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어린 시절 살던 동네였다.

수학 문제와 맞바꿨던 '소중한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골목길 어디를 서성여도 그곳에서 내가 누구와 놀았는지, 어머니가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어땠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의 저장고는 텅 비어 있었고, 그 자리에는 차가운 공식과 정답들만이 박혀 있었다.

다음으로 나는 억지로라도 웃어보려 했다.

영단어와 맞바꿨던 '웃음소리'. 하지만 입술을 아무리 일그러뜨려도 목구멍에서는 마른 소리만 새어 나왔다.

기쁨을 느끼는 감각 자체가 사라진 괴물, 그것이 지금의 나였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다시 모교의 담장을 넘었다.

마지막 남은 몇 시간의 생명을 쥐어짜며 거울이 걸려 있던 그 벽 앞에 섰다.

이제 거울 속의 나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노쇠해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펜을 꺼냈다.

그리고 거울 옆 콘크리트 벽에 마지막 문장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평생 공부했던 정답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에야 깨달은 오답 노트였다.


‘시간은 채우는 것이지, 당겨쓰는 것이 아니다.’


새벽이슬이 내릴 무렵, 경비원이 벽기둥 아래 쓰러진 한 노인을 발견했다.

노인의 손에는 구겨진 1등급 성적표가 쥐어져 있었고, 그의 얼굴은 평생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후회인지, 아니면 비로소 거래가 끝났다는 안도감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학생들은 벽에 새겨진 낙서를 보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오직 한 명,

전교 꼴찌를 도맡아 하던 절망적인 눈빛의 소년만이 그 문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소년의 눈에만 벽 너머에서 희미한 매점 문이 다시 열리는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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