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을 품에 안고서

by 이로

아버지 서재를 청소하다 땅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주워 올린다. 아버지가 쓰신 글이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찬찬히 읽어본다.



요즘 들어 좀 이상하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단 좀 짠하다?

길바닥에 핀 들꽃 한 송이를 봐도 마음이 저릿하다.

따끈한 차 한 잔에서 피어나는 김을 보면서도 멍하니 감성에 젖는다.

뜬금없이 오래된 노랫가락이 스치면 또 울컥한다.

심지어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때도 있다.

넷플릭스 다큐를 보다가도, 창너머 들려오는 옆집 애들 웃음소리에도 스르륵 눈물이 난다.

뜨거운 국물 한 숟갈 넘기다가도, 뭐랄까, 가슴이 턱 막히는 감정이 올라온다.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야, 나이 들면 다 그래."

왠지 모르게 한심하다는 듯, 아니면 당연하다는 듯 던지는 그 말에

겉으론 "맞아, 맞아" 하면서도 속으론 딴생각을 한다.

'아니, 나는 지금부터 진짜 사람이 되어가는 중인 것 같은데.'

물론, 이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나이 든다는 건 뭘까. 흔히들 노화(老化) 하면 몸이 낡아가는 걸 떠올린다.

젊을 때 그 짱짱한 활력은 사라지고, 허리는 굽고, 머리는 희끗하고,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 으, 생각만 해도 좀 그렇다.

그런데 과연 그게 다일까?

반대로 생각해 본다.

노년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의 과정이 아닐까.

젊은 날의 우리는 너무 많은 걸 쥐고 살았다.

더 위로 가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앞만 보고 달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기계처럼, 오직 효율이랑 성과만 쫓으며 살았다.

근데 나이가 들면서, 놀랍게도 그 많은 것들이 하나둘씩 힘을 잃는다.

욕망이라는 껍데기가 벗겨지고, 나를 옥죄던 끈들이 스르륵 풀린다.

그제야 비로소 진짜 '나'를 마주할 여유가 생긴다.

말하자면, 불필요한 앱들을 다 정리하고 폰 용량을 확보하는 느낌이랄까.

좀 더 가벼워지는 거다.


옛날엔 그냥 스쳐 지나가던 풍경들이 이제는 눈에 콕 박힌다.

바쁘게 걷던 걸음은 느긋해지고,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은 스르륵 열린다.

이전엔 그냥 배경 소음이던 것들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창밖에서 쟁쟁거리는 새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속삭임,

빗방울이 처마 때리는 영롱한 소리까지.

이게 다 예전엔 뭐였지? 그냥 '배경음악'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하나하나가 고유한 의미를 가진다.

마치 흑백으로만 보이던 세상이

이제야 비로소 찬란한 색깔을 입고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랄까.

어쩌면 그동안 내 마음이 닫혀 있어서 세상이 흑백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변화는 나만 겪는 일은 아닐 거다.

내 또래, 혹은 나보다 한두 살 더 먹은 친구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거다.


스무 살 땐 "손발 오글거려"라며 외면했던 시(詩)가 이제는 가슴을 때리고,

뻔한 신파극 주인공의 슬픔에 나도 모르게 눈물 훔치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왜 이럴까?

나는 이걸 '인간다움'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가면을 쓴다.

사회생활을 위해, 가족을 위해, 때로는 그냥 '남들처럼' 보이기 위해

진짜 감정을 억누르고 다른 얼굴로 살아간다.

슬픔은 숨겨야 할 약점이 되고, 기쁨은 유난 떨지 말아야 할 치기 어린 감정으로 치부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우리 내면의 섬세한 감각들은 무뎌지고, 영혼은 바싹 마른다.

사막처럼. 근데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에 목맬 필요가 없어진다. 잃을 것도, 얻을 것도 별로 없다는 생각에 비로소 솔직해진다.

억눌렸던 감정의 댐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우리는 다시금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들이 이제야 분출되는 건 아닐까?

별것 아닌 일에도 눈물이 난다는 건,

반대로 우리가 그만큼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다는 증거 아닐까?

이제 타인의 아픔에 더 깊이 공명하고, 작은 행복에도 진심으로 고마워할 줄 알게 된다.

지나온 세월 속에서 겪었던 수많은 경험들이 내 안에 단단한 뿌리를 내린 덕분이다.

그래서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지만,

동시에 그 작은 바람에도 섬세하게 반응하는 여유를 갖게 된다.

마치 오래된 거목이 더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그 그늘 아래에서 새싹을 품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나이 든다는 건 결국 깊어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이 듦은 가장 인간다워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의 불꽃같은 혈기와 패기는 희미해지지만,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깊어진 통찰력과 넓어진 포용력이다.

우리는 이제 삶의 아름다움과 비극을 동시에 이해하며,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

눈물이 많아졌다는 건 약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의 스펙트럼이 더욱 풍부해졌다는 증거다.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바뀐 것처럼, 내 감정의 세계가 훨씬 다채로워진 거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눈물이나 뭉클함에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노년이라는 이름의 선물이자, 진짜 사람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증표다.


우리는 지금,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보물들을 발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색깔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모든 소리를 경청하며,

모든 감정을 포근하게 안아줄 수 있는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나는 매일 이런 감정들을 마음속에 기록한다.

그 기록들이 쌓여 나만의 아름다운 인생 이야기가 될 거다.

나는 지금, 삶의 가장 찬란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난 아버지가 이미 어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도 나처럼 아직 성장 중이시구나.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오면서 창밖을 보았다.

노을이 창을 부수고 뛰어 들어와 내 품에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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