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조약돌은 왜 뾰족해졌을까
나는 ‘둥글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니, 원래 둥글게 태어났는데? 세상이 모나서 부딪히다 보니 뾰족해진 건데, 왜 나보고 깎으래?
어릴 적 우리는 보드라운 조약돌처럼 말랑말랑한 존재였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반짝였고, 그 어떤 필터 없이 모든 걸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그때는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냥 나 자체가 좋았고, 실수해도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틀려도 괜찮았다.
그때의 우리는 완벽하게 둥근 원이었다.
모난 세상과의 충돌
그런데 살면서 뾰족한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모가 나기 시작했다.
상처받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과정에서 뾰족한 각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어떤 모는 나를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되었고, 어떤 모는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삐져나왔다.
또 어떤 모는 그냥,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흔적이었다.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거울 속 내가 너무 모나 보였다.
그래서 애써 스스로를 둥글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남에게 맞춰주느라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발버둥 쳤다.
근데 이게 뭔가. 깎으면 깎을수록 아프기만 했다.
둥글어지기는커녕, 더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것 같았다.
‘아, 이게 아닌데.’ 싶었다.
솔직히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도 여전히 그렇다.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친구 관계나 연애에서도 ‘둥글게 둥글게’라는 압박을 받는다.
가끔은 '내가 이렇게까지 맞춰야 하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오는 ‘완벽한’ 사람들을 보면, 나만 모난 돌멩이 같아서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아직은 다이아몬드가 될 시간은 멀었고, 그저 깎여 나가는 중인 걸.
모난 채로 빛나는 법을 배우는 시간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굳이 그 모들을 깎아낼 필요가 있을까 싶다.
오히려 그 모난 부분들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만드는 특별한 증거가 아닐까?
내가 '모난 부분'들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특별한 증거라고 생각하게 된 건,
거창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사소하고, 어쩌면 좀 웃기기까지 한 경험들이 쌓여서다.
대학교 2학년 때였나.
팀플 과제가 너무 많아서 밤샘 작업을 하다가 피곤에 절어 조별 모임에 갔다.
보통 같으면 ‘죄송합니다’ 백 번 외치며 눈치 봤을 텐데,
그날은 너무 피곤해서 필터링 없이 말이 툭 튀어나왔다.
"아, 솔직히 이 과제는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아요. 그냥 각자 파트 나눠서 하고 마지막에 합치는 게 훨씬 빠르겠는데요?"
순간 팀원들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아, 망했다. 또 내 모난 성격 나왔네. 속으로 자책하고 있는데, 팀장이 의외의 말을 했다.
"어?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다 같이 모여서 씨름하는 것보다 그게 낫겠어요!"
그렇게 우리는 비효율적인 회의 시간을 줄이고 각자 맡은 부분을 쳐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과제는 일찍 끝났고, 우리는 꽤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아, 내 이 뾰족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또 다른 경험은 취업 준비를 할 때였다.
남들 다 스펙 쌓는다고 자격증이며 공모전이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때, 나는 뭔가 회의감이 들었다.
물론 나도 필요한 건 했지만, ‘남들 하니까 나도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억지로 하는 건 계속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대신 나는 내가 진짜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파고들고, 사람들과 토론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게 더 내게는 재미있었고 의미가 있었으므로.
‘이렇게 해서 취업이나 되겠어?’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끌렸다.
면접에서 면접관이 내게 물었다.
"다른 지원자들은 다들 화려한 스펙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은 특이하네요.
특별히 관심 있는 분야가 있습니까?"
나는 그때 내가 읽었던 책 이야기, 그 분야에 대한 내 생각들을 솔직하게 말했다.
준비된 답변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였기에 더 진심이 담겨 있었을 거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면접관들이 "솔직하고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해서 인상 깊었다"라고 했다더라.
그때 나는 확신했다. 남들과 다른 나의 '모난 부분'이 오히려 나를 돋보이게 했다는 것을.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깨달았다.
세상이 말하는 '둥근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
그냥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내 뾰족함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신선함이나 솔직함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다이아몬드가 수많은 압력과 시간을 거쳐 뾰족하게 깎여나가며 빛을 발하듯이,
나 또한 세상과 부딪히며 생긴 이 모난 부분들이 나를 더 단단하고 빛나게 만들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 때는 똑같은 기준으로 예쁘고, 잘나고, 성공한 삶을 꿈꿨다.
‘저렇게 되어야만 해!’라는 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아름다움은 완벽하게 둥근 원이 아니라,
각자의 모가 만들어내는 고유한 빛깔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살아온 세월 속에서 얻은 경험들은 우리 안에 수많은 모를 만들었다.
그 모들은 때론 상처의 흔적이겠지만, 동시에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 지혜의 흔적이기도 하다.
실패를 통해 얻은 깨달음, 아픔을 통해 배운 공감, 오랜 시간 쌓아온 인내심과 끈기.
이런 것들이야말로 남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나만의 보석 같은 모들이다.
생각해 보자. 다이아몬드가 왜 그렇게 빛나는지.
수많은 압력과 시간 속에서 각지고 모난 형태로 깎여 나갔기 때문이다.
그 모난 부분들이 빛을 반사하고 굴절시키면서 눈부신 찬란함을 만들어낸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살면서 부딪히고 깨지면서 생긴 그 모들이 바로 ‘나’라는 존재를 더욱 입체적이고 깊이 있게 만드는 원천이 되는 거다.
이 정도면 꽤 멋있지 않나?
비워낼수록 채워지는 삶의 지혜
내 모난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자연스럽게 비워지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욕심, 남의 시선에 대한 집착, 에너지 뺏는 인간관계 같은 것들.
하나둘씩 내려놓으면서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비워낸 자리는 진짜 나를 위한 공간이 되었다.
더 이상 남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고,
진짜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풍요는 소유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려놓는 것에 있다는 것을.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나머지를 비워낼 때, 삶은 훨씬 더 명료하고 아름다워진다.
왠지 좀 멋있는 말 아닌가?
이게 꼭 나이가 들어야만 깨닫는 지혜는 아니다.
요즘 20대들도 ‘미니멀리즘’에 열광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자’는 마인드를 추구하지 않나.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선택하고 꾸려나갈 수 있는 특권.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재능을 다시 꺼내볼 수도 있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취미를 시작할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이거야말로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러므로 해서 세상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
삶의 풍파를 겪으면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누군가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마음의 넓이가 생긴다.
나름대로 겪은 시행착오들은 나중에 내가 젊은이들에게 뭔가 말하려고 할 때 그들에게는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겪었던 삽질을 통해 그들은 좀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이런 관계 속에서 나 또한 살아있음을 느끼고, 의미 있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진짜 삶의 가치 아닐까.
꽤 낭만적이지 않나?
나는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빛나
그러니 더 이상 스스로를 깎아내려 둥글게 만들려고 억지로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세월이 만든 그 모난 부분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모난 부분들을 사랑하고 존중해 줄 것이다.
그것들이 바로 나라는 존재를 유일무이하게 만들고, 나만의 빛깔을 내게 하는 원동력이니까.
나이 듦은 결코 빛이 바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라는 선택을 거쳐 살아남은 고전 같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 쌓인 지혜와 경험, 그리고 그 모든 모난 부분들이 어우러져
나는 지금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거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둥글게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잠시 내려놓고, 그저 나답게 존재하려고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 모난 채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빛나는 나를 말이다.
내가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우리는 굳이 조약돌이 되려고 눈치 보고 아등바등할 필요 없다.
그냥, 나 자신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