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나도 모르게 멍하니 천장을 볼 때가 있다.
딱히 할 일은 없는데, 그렇다고 잠이 오는 것도 아닌 새벽 두 시 반.
오늘 아침엔 또 왜 이렇게 일찍 눈이 떠진 건지.
몸을 뒤척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새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건 나는 법이 아니라 추락하는 법이랬던가.
오, 그런데, 태어나서 한 번도 날아본 적 없는 나는 오죽할까. 나는 날개도 없잖아?
스물 여섯. 어리다고 하면 어린 나이고, 많다고 하면 많은 나이다.
사회생활 3년차. 벌써부터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제법 묵직하다.
돌아보면 아찔했던 순간이 한 둘이 아니다.
입사 동기들과 회사 욕하다 걸려서 다음날 아침부터 식겁했던 일,
중요한 발표 망쳐서 밤새 이불킥했던 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가 시원하게 차이고 한동안 인간관계를 끊었던 일까지.
아, 생각해보니 매 순간이 위기였다.
누가 내 청춘 드라마 써주면 맨날 막장 드라마 아니면 시트콤일 거다.
그래도 어쩌겠어. 나는 그 모든 쇼를 지나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엉덩방아 좀 찧어본 사람만이 아는 단단함으로,
상처 딱지 떨어지고 돋아난 새살의 굳건함으로 오늘을 버티는 중이다.
솔직히 스무 살 때는 완벽한 삶을 꿈꿨다.
인스타 감성 뿜뿜하는 삶, 실패 없는 성공, 막말로 건물주 정도는 돼야 인생 좀 살았다 싶은 거 아닌가?
근데 요즘엔 그냥 망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원래 불완전해서 아름다운 거라고 누가 그랬더라?
그때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여 새로운 예술로 만드는 '킨츠기'라는 게 있다지.
나의 20대도 딱 그 짝이다.
멘탈 바사삭 됐던 순간들, 흑역사 퍼레이드, 눈물 콧물 다 뺐던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라는 고유의 무늬를 만들어냈다.
뭐,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 버틸 만하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몸은 예전 같지 않다는데, 스물 여섯에도 몸은 예전 같지 않다.
야근 좀 했다고 다음 날 골골거리고, 잠을 아무리 자도 피곤하고, 괜히 여기저기 쑤신다.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 진짜 어쩌지?
한때는 당연했던 밤샘과 에너지 드링크가 이제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하나씩 잃어가는 기분. 상실의 시대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다.
하지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고, 위로랍시고 누가 그랬지.
나도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사소한 것들에서 기쁨을 찾는 지혜.
예를 들면, 점심시간에 먹는 김치찌개에 라면 사리 추가.
맑게 갠 하늘 보면서 ‘오늘 날씨 좋네’ 중얼거리는 것.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개나리가 생각보다 예쁜 것.
조카가 나 보면 반갑다고 달려와 안기는 것.
카톡 프사에 ‘읽지 않은 메시지 1’ 표시 안 뜨는 것.
이런 것들이 나름의 행복을 준다.
욕심을 덜어낸 자리에 너그러움이 채워지고, 조급함이 떠난 마음에 평온이 깃든다?
이건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조급하고, 욕심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조바심내며 굴지는 않게 된 것 같다.
그냥 좀 느려진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인생을 살아낸다는 건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다고 했다.
청춘이 앞만 보고 달리는 벼락치기 공부 같은 거였다면,
지금의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내 정원을 돌아볼 시간이다.
내가 심은 건 잡초가 대부분인 것 같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꽃 한 송이는 피었겠지.
완벽하게 가꿔진 정원은 아닐지라도, 그 안에는 지난 세월의 땀과 눈물,
그리고 가끔 찾아왔던 기쁨과 환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정원.
이 정원을 가꾸는 건 결국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스물 여섯까지의 결론이었다.
물론, 때로는 외롭고 불안하다.
취업은 했지만, 과연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내 앞길에 내리막길만 남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스산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리막길이라고 왜 즐기지 못하겠는가.
힘들게 오르막을 오를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내리막길에서는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보다, 이제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된 여유가 더 큰 선물이 될 수도 있다.
뭐, 내리막길은 무릎이 덜 아플 테니 그건 좋겠다.
그러니 너무 쫄지 말자.
나이 듦은 쇠락이 아니라 어쩌면 완성에 가까워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추락 끝에 자신만의 날갯짓을 터득한 새처럼, 나도 수많은 넘어짐 끝에 인생을 나는 법을 배웠다.
날개는 없지만, 나에게는 지난 세월이 남겨준 지혜와 통찰이라는 더 큰 날개가 있다. 이건 진심이다.
최소한 나는 내가 개고생해서 얻은 것들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니까.
오늘 하루, 창가에 스며드는 햇살을 느껴보자.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좋아하는 인디 음악을 들어본다.
팟캐스트에서 오늘 만평도 한번 들어볼까.
지나온 길을 대견하게 여기고, 다가올 날들을 담담하게 맞이하자.
그렇게 평온하고 따뜻하게 오늘을 살아가자.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침내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내 인생의 비행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아, 물론 착륙 연습도 꾸준히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