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의 재발견

by 이로

시작은 늘 사소한 데서부터였다.

톡방에 친구가 올린 릴스 하나.

고양이가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춤을 추는 영상이었다.

“야, 이거 진짜임? AI 아님?” 내가 물었다.

친구는 답 대신 웃는 이모티콘만 보냈다.

별것 아닌 영상인데, 괜히 궁금했다.

진짜 고양이가 저렇게 춤을 출 수 있을까? 아니면 특수 훈련을 받은 걸까? 설마 AI가 만든 가짜 영상?

온갖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어릴 땐 그랬다. 세상 모든 게 물음표투성이었다.

엄마, 저건 왜 그래? 아빠, 하늘은 왜 파래? 끊임없는 질문 세례에 어른들은 가끔 지쳐 보였다.

그래도 내 눈엔 늘 반짝이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세상을 향한 설렘이랄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그 많던 물음표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 건.

스무 살을 훌쩍 넘기고 보니, 웬만한 일엔 '어른의 평정심'이 생겼다.

쓴맛 단맛 다 봤다는 듯,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드라마를 봐도 다음 장면이 뻔히 보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다 거기서 거기지’ 싶다.

미리 선을 긋고, 마음의 창을 닫아버린다. 쿨병 걸린 것처럼.

사실 그게 쿨한 게 아니라, 그냥 무덤덤함이나 따분함의 다른 이름일 때가 많다.

진짜 노화는 이마에 주름이 느는 게 아니라, 마음의 빗장이 녹스는 순간에 시작되는 거 아니겠나.

요즘 나는 좀 시들했다.

딱히 열정적으로 달려들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냥 쉬자니 불안했다.

‘갓생’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정작 뭘 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그런 딜레마.

다들 취업이니 스펙이니 떠들어대는데, 나는 그냥 매일 똑같은 루틴 속에서 표정 없는 얼굴로 걸어 다니는 좀비 같았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옆에 서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찍고 계셨다.

작은 꽃집 앞에 놓인, 시들어서 버려질 것 같은 화분들을 확대해서 찍고 계셨다.

쭈그리고 앉아 이 각도 저 각도 바꿔가며 셔터를 누르는 할머니의 진지한 모습에 궁금증이 생겼다.

대체 저 할머니는 왜 저 시든 꽃을 찍고 계실까? 혹시 그림을 그리시나?

아니면 식물 연구라도 하시는 걸까?

집에 와서 나도 모르게 '시든 꽃 사진 잘 찍는 법'을 검색했다.

수많은 블로그와 이미지들 사이에서, 할머니가 찍었을 법한 느낌의 사진들을 찾아 눌러봤다.

시들어가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잎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어색하게 쭈그리고 앉아 사진을 찍던 할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요즘 뭘 궁금해하며 살았지?


며칠 뒤, 동네 서점에 갔다.

딱히 살 책이 있어서 간 건 아니었다.

그냥 둘러보는데, 한 코너에 ‘심리학’ 관련 책들이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테다. 그런데 그날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뭘 할 때 가장 나다울까?’ 너무 당연해서 미처 던져보지 않았던 질문.

나는 무심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책 제목은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너무 흔한 제목이라 지나쳐버리려는데 이상하게 끌렸다.

책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는 건 뭐지? 싫어하는 건? 어떤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거지?

스무 해를 넘게 살면서도, 정작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다음날 다시 처박아두었던 악기를 꺼내보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 뒷길을 걷기도 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내일 아침 창밖의 날씨를 궁금해하는 마음,

새로 나온 웹툰의 다음 화를 궁금해하며 기다리는 즐거움,

좋은 사람과 나눌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

이런 작은 설렘과 기대가 모여 하루를 채우고,

그 하루가 모여 빛나는 인생이 되는 거 아닐까.

몸은 세월을 거스를 수 없겠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반짝이는 물음표로 가득 채울 수 있다.

그게 진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지혜가 아닐까.

오늘 나의 마음속에는 어떤 물음표가 떠올랐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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