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거실을 서성였다.
창밖은 먹빛이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어둠을 겨우 밀어내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아이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도화지 위에 크레파스로 그린, 알록달록한 무지개와 해맑게 웃는 사람들.
아이의 눈은 언제나 저렇게 초롱초롱 빛난다.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말들만 골라 들려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마치 갓 지은 새하얀 옷에 흙탕물 하나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온통 아름답고 정의로울 거라는 주문을 걸고 싶어진다.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란다.”
“정직하게 노력하면 언젠가는 꼭 성공할 수 있어.”
내가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들.
그래서 아무런 의심 없이 내 아이들에게 대물림하는 선하고 따뜻한 문장들.
그런데 이 말을 하면서, 단 한순간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지 않는다면.
어쩌면 나는 아이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아주 능숙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꽤나 그럴듯한 거짓말 말이다.
아이와 함께 밤하늘의 별을 보며 "세상은 아름답지?"라고 말하는 순간,
내 머릿속으로는 쉴 새 없이 흘러 들어오는 끔찍한 뉴스들이 스쳐 지나간다.
저 멀리서 터지는 전쟁 소식, 굶주리는 아이들의 눈빛, 끝없는 불평등과 혐오.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하기엔 그 이면의 추악함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겠다고 이 모든 어둠을 가린 채 반쪽짜리 진실만을 보여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더 난감한 건 '노력과 성공'의 관계다.
아이가 시험을 망치고 속상해할 때, 나는 너무나 쉽게 "네가 더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래"라고 말해버린다. 정말 그럴까? 내가 살아온 세상은 노력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공정한 운동장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노오력'이라는 뼈아픈 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잖아.
노력의 가치를 가르치는 건 중요하지만, '노력이 곧 성공'이라는 무책임한 공식을 주입하는 건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언젠가 아이는 자신의 실패를 오롯이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좌절하게 될지도.
그건 내가 겪었던 아픔을 아이도 겪게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만 해도 씁쓸했다.
물론 내가 아이들에게 이런 '선한 거짓말'을 하는 이유를 안다.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적어도 희망과 용기로 가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현실의 냉혹함을 너무 일찍 알려주어 아이가 지레 겁을 먹거나 냉소적으로 변하길 원치 않아서다.
아이를 실패의 상처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부모의 애틋한 마음.
그게 충분한 변명이 될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아이를 무균실 안에서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는 언젠가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때 아이에게 필요한 건 막연한 낙관론이 아니다.
세상의 맨얼굴을 마주할 용기, 그리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갈 힘.
어른으로서 내가 줘야 할 건 그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말해주려고 한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만 있지는 않아. 슬프고 아픈 일도 많단다.
그래서 네게는 아름다운 순간을 스스로 찾아내고, 또 만들어나가는 지혜가 필요해.
마치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주는 아이처럼 말이야.
그런 아이가 지금의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거야."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항상 이기거나 성공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그게 세상의 현실일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쏟아부은 노력은 절대로 너를 배신하지 않아.
그 노력은 고스란히 네 안에 쌓여서, 어제의 너보다 오늘의 너를 더 단단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야.
그게 노력의 진짜 힘이야.
너는 이미 너의 노력을 통해 성장하고 있어."
아이에게 필요한 건 '세상은 무조건 아름답다'는 환상이 아니다.
추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이다.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보증수표가 아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의 소중함을 아는 마음이다.
내가 아이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짜 유산은 결점이 없는 완벽한 세상에 대한 거짓말이 아니다.
결점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으며 꿋꿋하게 걸어 나갈 수 있는 단단한
두 다리를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위대한 사랑이 아닐까.
어쩌면 나 자신에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