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리님, 새 직원 오셨대요!"
김대리의 목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점심시간 직후라 나른하던 사무실 공기가 일순간 활기를 띠었다.
드디어 오는구나. 내 옆자리. 내심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새 직원은 어떤 사람일까? 꼰대 상사만 아니면 좋겠다고 빌었다.
똑똑. 문이 열리고, 팀장님 뒤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헐. 키 크고, 어깨 넓고. 딱 봐도 모델 핏이었다.
깔끔한 슈트 차림에 시선이 절로 갔다.
이름은 박선우. 흠, 이름도 멋있네.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는 또 어찌나 부드럽던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박선우 대리는 내 옆자리, 그러니까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서류를 정리하는 모습도 어쩜 저리 깔끔할까.
사원증을 목에 거는 모습마저 화보 같았다.
옆에서 힐끔힐끔 훔쳐봤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아, 나도 모르게 일에 집중하는 척했다.
며칠 뒤, 박선우 대리는 자기 자리 앞 게시판에 예쁜 글귀를 붙여 놓았다.
'오늘 하루도 빛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뻔한 문구인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출근할 때마다, 커피 마시러 갈 때마다, 화장실 갈 때마다 괜히 그 글귀를 쳐다봤다.
꼭 나를 응원해 주는 것 같아서. 일하다가도 고개 돌려 힐끔 봤다.
그 글귀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어느 날 오후였다.
마감 때문에 야근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박선우 대리가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잠들어 있었다. 피곤했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였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타줄까? 고민하다가 말았다.
괜히 오지랖 부린다고 생각할까 봐.
그냥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마저 귀엽게 들렸다.
그때부터였을까. 그에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게.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내 시선은 자꾸 시계로 향했다.
째깍째깍. 시간아, 더 빨리 가라!
박선우 대리가 퇴근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리면 왠지 모르게 설렜다.
"이대리님, 먼저 가세요!" 그가 먼저 퇴근하려 하면 아쉬움이 밀려왔다.
어떻게든 같이 퇴근하고 싶었다.
"아, 저도 이제 가려고요!" 하고는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짧은 시간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온갖 대화를 시뮬레이션했다.
하지만 막상 마주 보고 서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선우 씨, 혹시 차 한 잔 하실래요?" 이 말을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할까 말까? 까일까? 에이, 그냥 질러봐?'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결국 금요일 퇴근길, 용기를 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카페에 앉아 마주 보는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음이 되었다.
겨우겨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니, 일주일의 고민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달콤한 차의 향기가 몸을 적셨다.
어느 날, 박선우 대리가 퇴사를 한다고 했다.
엥?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온종일 마음이 뒤숭숭했다.
마지막 날, 나는 자원해서 외근을 나갔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고 나면 너무 슬퍼질까 봐. 비겁하게 도망쳤다.
그렇게라도 나의 마음을 감추고 싶었다.
비 오는 날, 밖은 축축했다. 내 마음도 그랬다.
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의 자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서랍을 열어봤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곳에는 뜯지 않은 편지 한 통이 있었다.
내가 차 한 잔 하자고 했던 날, 그날 밤에 썼던 편지였다.
'선우 씨,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여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평범한 인사말이었지만, 내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편지를 그는 영영 읽지 못했겠지.
나도 모르게 편지를 꽉 쥐었다.
구겨진 종이 조각이 손끝에 느껴졌다.
박선우 대리가 사무실에 처음 오던 날,
게시판에 글귀를 붙이던 모습, 피곤해서 엎드려 자던 모습, 함께 퇴근하며 나누던 짧은 대화,
그리고 차 한 잔 했던 그 순간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그는 몰랐겠지. 이 모든 순간들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짝사랑은 원래 이렇게 바보 같은 걸까.
혼자 시작해서 혼자 끝내는, 이 알 수 없는 감정.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를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었고, 작은 순간들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그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일상 속에도, 당신이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작은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혹시 당신의 서랍에도, 뜯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누군가의 진심이 담긴 편지가 한 통쯤은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