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사람, 상황, 환경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어떤 글에서 보았다. 행복도 습관이라고. 부와 명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 계속 행복하다고.
나는 사람 좋아하고 외향적이며 사람들의 감정에 공감을 잘해주는 아버지와, 다소 냉소적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확실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나는 두 분의 영향을 고루 받아서 적당히 외향적이고 다소 냉소적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어머니를 닮았다. 월급 받으면 사람들과 즐기느라 주머니가 얇아지는 아버지가 단돈 100만 원을 갖고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잘 키우기 위해 악착같이 아끼고 모으셨고 지금은 그 덕분에 어디서든 당당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러한 삶 동안 본인이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을 다 제쳐두고 오롯이 가족을 위해 힘쓰셨다.(희생이란 표현은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어머니는 다소 냉소적인 것처럼 보이고 좋아하거나 즐거움이 없어 보인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라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무엇가에 열광하거나 좋은 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서툴다. 행복한 것을 행복하다 즐거운 것을 즐겁다고 표현하지 못한다. 또한 양보하는 것, 참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져 한 번씩 잘못된 방법으로 눌렀던 감정이 표출된다.
최근 어머니 환갑 때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갖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셨는데, 그것을 사드렸다. 환갑 때 더 좋은 것을 해드리고 싶었지만 좋아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원하는 선물을 해드렸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미적지근하게 넘어갈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그 선물을 보시더니 정말 너무 마음에 든다고 큰 소리로 좋아하셨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좋아하실 수 있는 분이었다니, 좋아해 주셔서 너무 행복했고 내가 평소에 어머니를 잘 몰랐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감정과 행복한 감정과 미안한 감정이 복잡스럽게 다가왔다. 그것을 보며 앞으로 더욱 내가 새로운 경험과 좋은 것들을 많이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시지만 원하는 것이 있으시고 또 다 좋아하고 있으시니깐.
서두가 내 이야기로 길었다.
내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나도 '감사' 보다는 '불만'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아직도 훈련 중이다. 어떤 사람을 보면 그런 생각 할 때가 있지 않은가? '어떻게 저 사람은 저렇게 긍정적이지?', '저 사람은 무엇을 해도 잘될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그 사람이 먼저 찾기보다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따른다. 그 사람이 원치 않아도 서로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하고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나누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사업을 하며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대부분 소위 '잘 나간다.' 그리고 '감사'의 가치를 안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 나의 환경에 항상 감사한다. 물론 긍정적이라고 모두가 잘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놀라운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종일 치열하게 현업을 뛰고 깊은 고민에 빠지면 감사보다는 불만의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왜 이렇게 됐을까?' ,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까?' , '왜 이렇게 일하지?' , '나는 참 힘든 사람이다.' , '나에게만 왜 이렇게 어려운 미션과 상황이 오는 것인가?' 그런데 나의 유일한 취미인 러닝을 하며 이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내가 지금 이렇게 뛸 수 있음에 감사함을' , '나와 함께 해주는 동료가 있음에 감사함을' ,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 있음에 감사함을' , '그들의 노력과 헌신에 감사함을'이 모든 것이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아주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경험을 자주 한다.
A라는 구성원을 봤을 때, 그 친구의 약점을 바라보면 참 답답하고 무능해 보인다. 그런데 반대로 그 친구가 잘하는 점을 바라보면 너무나도 유능한 인재다. 이 또한 내가 '감사'와 '불만'의 한 끝에서 나온다. 그 사람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장점이 부각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면 항상 '감사'한 사람이 된다. 반면에 단점에 집중하여 '불만'으로 바라보면 서로 배척하다 결국 이별할 것이다. '감사'와 '불만'은 동면의 양면처럼 같은 사물을 보았을 때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냐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건강한 육체가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완전 동의한다. 우리가 스님이나 신부님, 목사님과 같은 정신을 수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정신이 육체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육체 안에 건강한 정신이 있을 수 있다 생각한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싶다면 건강한 육체를 위한 꾸준한 운동과 생활이 필요하다.
요즘은 도파민의 시대이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숏츠를 보면 '부자 되는 법' , '퇴사하세요' 등 자극적이며 성공이 쉽게 느껴질 수 있는 콘텐츠가 즐비한다. 좋은 콘텐츠이지만 한 편으로는 아쉽다. 성공이란 게 무엇일까. 돈이 많은 것? 명예가 높은 것? 물론 일정 수준의 자본은 윤택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렇지만 진짜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까? (아직 나는 돈이 없지만... 궁금하다...) 충분한 실패의 과정을 통해 성취를 얻고 또 그것의 본질을 깨닫으며 성장해야만 요즘 말하는 '성공'의 의미와 가까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께서 내가 중고등학교시절 때 항상 약주를 드시면서 나한테 했던 말이 딱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네 삶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깐 네가 선택하고 책임져라.'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감사한 부모님의 교육철학이다. 두 번째는 '나는(여기서 나는 아버지다.) 너무 행복한 사람이다.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살 집이 있고 풍족하지는 못할지언정 먹고 싶은 것 먹을 수 있고 이렇게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깐'이라고 매번 말씀하셨다.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평범한 블루칼라 직장인이시다.) 그때는 그냥 술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을 모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올해 초 9년의 연애를 끝으로 사랑하는 와이프와 결혼을 했다. 이 친구와 만들어가는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 대단한 것이 필요 없다. 같이 주말에 등산이나 러닝하고 돌아오며 김밥에 라면 한그릇을 나눠 먹으면 일런 머스크 부럽지 않게 행복하다. 이 친구랑 함께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며 현실과 미래의 간극, 그리고 풀어야 할 많은 문제들에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럼에도 감사하다. 건강함에 감사를, 일할 수 있음에 감사를,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를,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와이프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자본의 가치가 최고라고 여겨지고 항상 경쟁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최고의 인재들이 힘든 사회지만 오늘도 '감사'하며 살아갔으면 한다. 나도 계속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