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강의
정신과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에게 정말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후배들에게 교직관에 대해 강의해 달라는 연락. 전화를 끊고 나서 ‘인연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가슴에서 몽글몽글하게 피어나는 기쁨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같이 근무하며 비슷하게 대학원에 다녔던 선배는 나처럼 병원을 그만두었다. 내가 보건교사 임용고시에 도전할 무렵, 선배는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모교 대학에 가서 교수가 되었고, 지금은 학과장이 된 존경하는 선배였다. 선배가 교직을 담당하는 교수들에게 나를 강력 추천했다고 한다. 이유는 이 학교를 졸업한 선배로서 병원 경력, 보건교사 경력에 작년에 공동 저자로 책을 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갑자기 연락을 준 선배는 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꼭 와서 달라진 학교도 보고, 후배들에게 강의도 해줘. 책도 쓴 선배가 강의하면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거야.”
이 연락을 남편과 자녀들에게 이야기하니 대단하다면서 엄지척을 해줬다. 강의비는 왕복 KTX 비용과 거의 비슷했지만 선배의 부탁이라 거절하기 싫었고, 꼭 한 번은 후배들을 만나고 싶었다. 두 번은 내게 무리였다.
교감 선생님에게 모교에서 보내준 공문을 제출하며 외부 강의 신청서를 작성했다. 토요일 강의라, 다른 교사들에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학생들 대상으로 이런저런 활동을 하지 않는, 그냥 평범한 보건교사라서 쑥스러웠다.
날짜가 점점 다가왔다. 강의 내용을 구상하며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강의 연습을 해가며 막바지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기차 시간과 강의 시간이 딱 떨어지지 않아 2시간 일찍 도착했다. 선배가 데리러 왔는데 서로 나이만 들어감을 확인하고 20년 만에 만나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30년 만에 밟아보는 대학교. 새 건물들이 들어서 새롭게 보였다. 이 학교를 그렇게 다니기 싫어했는데… 감회가 남달랐다. 2시간 뒤에 교직을 이수하는 후배들과의 만남. 당시에는 남자 동기들이 없었지만, 지금은 남자 후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보다 앞선 전문가 강의가 있어서 모두 지친 얼굴이었지만 활짝 피어난 젊음은 감출 수 없었다.
1시간 30분 강의가 끝날 때쯤, 눈빛이 반짝거렸던 학생들만 대상으로 한 명씩 찾아가 질문을 던졌다. 현직 선배 교사에게 업무나 수업에 대해 직접 들으니 유익했다는 소감을 들으니 나름 뿌듯했다. 문을 나서는데 가장 눈빛이 살았던 여학생이 노트를 들이밀며 부탁했다.
“선배님! 제가 책은 못 샀지만, 대신 노트에 사인 좀 해주세요.”
“사인? 이런 건 처음인데. 이름이 뭐예요?”
처음 받아보는 사인 요구에 손이 떨렸다. 사인은 유명한 작가나 내가 좋아하는 야구선수들만 하는 줄 알았으니까.
“제가 이런 건 처음이라 글씨가 엉망이네. 이해해줘요. 그런데 진짜 수업 열심히 듣더라고요.”
수줍게 인사하며 가는 여학생을 보며 선배에게 칭찬을 건넸다.
"저 학생은 진짜 열심히 듣더라구요. 앞으로 잘 될 것 같아요. 그런데 학생들 취업은 잘 되나요?"
"요즘 의대 문제로 취업이 어려워. 대형 병원을 가려면 이제 영어도 잘해야 돼. 그래서 2학년 이상 원하는 학생들 대상으로 영어 공부할 기회를 줘. 레벨 테스트도 해가면서."
"진짜요? 저 졸업할 때만 해도 대형 병원에서 시험만 합격하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영어 시험은 따로 안 봤잖아요?"
"그랬지. 근데 지금은 달라졌어."
집으로 올라가는 기차 좌석에서 생각에 잠겼다. 졸업한 대학에서 연락도 처음이었지만 후배들 앞에 서는 강의는 솔직히 떨렸다. 금방 끝내겠다는 후배들과의 약속을 못 지키고 혼자 떠들다 시간을 꽉꽉 채웠다. 게다가 초등학생들에게 하는 내 방식대로 후배들에게 배운 점, 느낌, 소감을 물어보고 다녔다. 궁금한 거 물어보라는 마지막 질문에 조용했을 때, 그대로 끝낼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창밖을 바라보니 봄이 초록을 남기고 떠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간호사들도 취업이 힘들어 알아주는 병원에 들어가려면 영어가 필수가 되어 버린 세상이 와 버렸다. 토요일마저 아침부터 오후까지 수업으로 꽉꽉 채우는 후배들이 원하는 곳에서 행복하게 일하길 바라는 마음을 강의실에 두고 온 나는, 떠나는 봄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