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더

꽃말: 침묵

by 살랑살랑

한때 여긴 이름 대신 숫자로 불렸지
지도 위에 찍힌 좌표,
연기와 파편이 흩어지던 자리.
넌 기억나? 난 아직도 기억나.

무너진 철모와 녹슨 탄피를
자신의 입안 가득 머금은채
땅은 오래도록 입을 다물고 있었어.

라벤더들.
그 작은 꽃들이
바람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들었지만
그 어떤 꽃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

침묵.

하지만 그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기억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심같았어.

보랏빛 물결이
마치 상처 위에 덮인 붕대처럼
조용하며 완강하게
이 땅의 흉터를 감싸니,
나만 아직 그 불길속을 걷는것 같더라.

누군가는 이곳을
사진 속 평화라고 부르겠지.
하지만 꽃들은 알고 있어.
뿌리가 닿은 곳마다
사라지지 않는, 사라지면 안돼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그래서 그 들판은 더욱 향기로웠고
그래서 그 들판은 더욱 조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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