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얼굴과 광대 주위로 얇게 퍼져있는 주근깨, 이 둘의 조합은 생각 외로 잘 어울렸고 귀여웠다. 빨간 머리 앤의 발랄함이 느껴진다라고 할까. 나는 잡티 없는 얼굴을 원했지만, 사람들은 주근깨가 나의 매력이라고 했다.
양양으로 이사 후 도시에서 함께 하던 친구들, 지인들이 종종 놀러 왔다.
그들은 나를 보고
" 옥랑아, 네 얼굴이......."
"피부가 많이 상했다."
"기미, 주근깨가...."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양양에서 친하게 된 동생들도 내 피부가 좋았었다는 말에 "언니 가요~?" 하며 놀라움을 표하곤 했다.
이목구비가 예쁜 편은 아니어도, 하얗고 좋은 피부와 동안인 얼굴은 은근한 나의 자랑이었는데 많이 속상했다.
양양으로 귀촌 후 하루 종일 볕이 잘 들고 양지 마른 곳, 그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꿈꾸던 전원생활을 시작하려니 맘이 설레었다.
장이 서는 날이면 ' 어느 것을 심어야 직접 기른 야채를 먹어볼 수 있을까..' 하며 모종을 구경했고
모종 가게를 나설 때면 '조금만 심어봐야지..' 했던 처음 마음이 무색하게 두 손 넘치게 모종을 사 가지고 왔다.
꽃과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나는 그 꽃들의 오묘한 색과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 계획에도 없는 과실수, 꽃들을 사들이곤 했다.
모종과 꽃, 나무들도 구입했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땅을 파고 심고 하는 일들이 남았다.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해야 하는데 나는 사실 하얀 피부를 잃을까, 기미 주근깨가 더 생길까 햇빛이 두려웠다. 햇빛에 조금만 노출이 돼도 금방 주근깨가 생기는 일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썬크림을 진득하게 바르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작업을 했지만 며칠 사이 내 얼굴에 갈색 점들이 더 늘어났다.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갈색 점들도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광대뼈 볼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있던 주근깨들이 눈 옆으로, 눈 위아래로 영역을 넓혀가고 옅었던 갈색들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신랑과 함께 서핑을 하러 바다로 나갔다.
바다에 나가는 날은 선크림을 더 꼼꼼하게 바른다. 진득하다 못해 패왕별희 주인공처럼 눈만 빼고 전체가 하얀 내 얼굴.
'이렇게 왕창 발랐는데 괜찮겠지!' 하며 바다에서 신나게 논 후 씻고 나와 거울을 보니 그 몇 시간 사이 기미, 주근깨는 더 올라오고 짙어져 있었다.
서핑을 하러 갈 때마다 이렇게 늘어가는 기미, 주근깨를 보니 서핑을 하러 가기도 꺼려졌다.
운전할 때는 또 어떤가!
시골의 넓고 뻥 뚫린 도로는 초보운전인 내가 운전하기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지만 작열하는 태양의 이글거림을 막아줄 무언가는 아무것도 없다.
선크림과 선글라스, 모자로 자외선을 막으려고 하지만
이들은 아주 약간의 방패막이뿐이 되지 못했다.
피부를 지키고자 나름 노력했지만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기미, 주근깨가 온 얼굴을 뒤덮었고 곧 내 피부는 칙칙해지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서 농장에서 일을 할 때도 기미, 주근깨를 막기 위해 숨 막히는 더운 날씨에도 모자 아래 수건을 칭칭 감고 일을 했었다. 일을 다녀와서 수건을 벗겨내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기 일쑤였지만, 얼굴이 좀 벌게 지면 어떠랴! 나에겐 피부를 태양으로부터 지켜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호주는 오존층이 없어서 자외선을 걸러내지 못하고 그대로 뚫고 나온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지켜낸 피부였는데 이제는 전원생활을 누리고 있는 덕분에 기미, 주근깨가 얼굴을 뒤덮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이었을까.. 대상포진이 생겨 피부과 진료를 보게 됐다. 대상포진으로 인한 방문이었지만 의사 선생님과 나의 대화 주제는 어느새 기미, 주근깨로 이어지고 있었다.
화장기 하나 없었기에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얼굴의 잡티.
선생님은 마스크를 벗은 내 얼굴을 보더니 '아이고.. 관리를 좀 하셔야겠네요..' 하셨다.
내 피부는 딱 서양인의 피부라 모공이 없는 장점이 있는 대신 기미, 주근깨가 굉장히 잘 생기는 피부라 어쩔 수가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
더불어 관리가 꼭 필요한 피부라는 것도 빼놓지 않으셨다.
잡지나 티브이에서 흔히 봤었던, 백인 여자의 얼굴이 스쳐갔다. 콧등과 양볼에 주근깨가 빼꼼하게 자리 잡고 금발, 혹은 갈색의 머리의 키가 크고 날씬한 여인들. 주근깨조차 굉장히 잘 어울렸던...
그들은 아름다웠고, 모델들이었다.
나랑은 달랐다.
40대 중년의 나이에 얼굴을 뒤덮은 기미와 주근깨로 나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귀촌 한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들도 많이 만나봤지만 유독 내 얼굴만 심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여름 내내 바다에 나가 살았던 남편의 얼굴을 보라!
기미, 주근깨가 무엇이더냐.. 3년째 바닷바람, 바다 태양을 내리쬐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잡티 하나 없다.
(시커메지긴 했다.ㅎㅎ)
그 후 나는 자외선 90%를 차단하는 까만색 모자 일명, 아줌마 모자와 눈 밑부터 목까지 다 가리는 자외선 차단 마스크를 구입해서 밭일을 할 때도, 운전을 할 때도, 바다에 갈 때도 쓴다.
기다란 마스크를 착용한 내 모습을 본 친한 동생들이 웃으며 '언니, 왜 턱받이를 하고 왔어요? ㅎㅎ' 하고 말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어디든 하고 다닌다.
일상생활을 하며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지킬 수 있는, 나름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다.
양양으로 귀촌 후 전원생활에 만족하며 살고 있지만
기미, 주근깨는 생각해 보지 못한 복병이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고 하지만 고운 피부를 잃는 건 내겐 정말 속상한 일이다.
맘도 곱게 늙어가고 싶지만 외모도 또한 곱게 늙어가는 게 나의 작은 소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올겨울에는 그동안 시골에 적응하느라 애쓴 나에 대한 선물로 미뤄왔던 피부관리를 받아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