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아무 의미 없지가 않아.
우리 집은 곤충들의 놀이터
청명하고 드높은 하늘,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솜사탕 같다고 느낄 무렵이면 우리 집 마당은 수많은 곤충들의 놀이터가 된다. 쌍을 지어 날아다니는 잠자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형형 색색의 호랑나비,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와 뛰어다니는 여치와 메뚜기, 집 외벽에 꼭 붙어있는 사슴벌레까지.. 수많은 곤충들에 둘러싸인 우리 아이들은 그들을 잡는 재미에 한껏 빠져 있다. 특히 나비나 잠자리가 보이면 어느 순간 매미채를 들고 쏜살같이 달려가 그들을 잡으려 한다. 곤충들을 잡는 아이들에게 “잡고 있다가 풀어줘~” 말하지만 잡는데 열중한 아이들은 내가 한 말은 곧 잊고 만다.
어느 날의 일이다. 예쁘고 화려한 날개를 가진 나비 두 마리가 향기 좋은 꽃에 앉아 노닐고 있었다. 그 모습이 평화롭고 좋아 보여 아이들이 나비를 그냥 두길 바랐지만 아이들은 기어코 그 나비를 잡아 곤충채집통이 넣고야 말았다.
“나비 관찰하고 있다가 풀어줘~”
아이들은 “네~” 하고 대답했지만 아이들도, 나도 나비의 존재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그제야 눈에 들어온 곤충채집통의 나비. 채집통 안에서도 계속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진작에 풀어줬어야 했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통을 열고 나비를 내보내 줬다. 하지만 밤새도록 날갯짓을 하고 있었을까.. 날개 한쪽 끝이 살짝 찢어져 날지를 못하고 있었다. 햇빛이 쨍한 날이라 그늘이 있는 곳으로 나비를 옮겨주었다. 어떻게든 날고 싶어 날개를 파득파득 하는 나비의 모습이 처연하고 애잔했다. 마음이 아렸다. 살기 위해 저렇게 파득거리며 애쓰는구나.. 날갯짓만 하다 죽어가진 않을지.. 애달파 더 이상 나비를 마주할 수 없어 마당을 빠져나왔다.
곤충을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들 수 있구나.. 시골에서 살게 된 후,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일까?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에 대한 나의 마음이 변해가고 있었다. 모든 생명이 살기 위해 애쓰고 있구나.. 아.. 그렇구나. 그들과 함께 할수록, 그들을 관찰할수록, 그리고 우리의 편의에 의해 죽어가는 그들을 볼수록 찡해져 아려오는 나의 마음 한켠.
나즈막한 언덕 위 우리 집은 뒤편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되면 산모기들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우리만 산다면 모르겠는데, 민박을 하고 있기에 손님들을 위해 방역을 주기적으로 했다. 방역을 하기 시작한 첫해에는 눈에 안 들어왔던 것들이 올해에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기를 없애기 위한 방역이었지만, 그 약품들은 다른 곤충들의 생명까지 앗아갔다. 방역을 하고 난 다음날이면 뒤집어서 죽어있는 사슴벌레나 다른 곤충들이 어김없이 눈에 보였고 그 모습이 눈에 밟혔다.
처연하고 애잔함. 다시드는 그 마음.
‘아..방역을 하면 모기를 죽이기 위해 전혀 해가 없는 이런 곤충들까지 죽게 되는데 이렇게 해야 하나?’
자연 속에 살면서 이런 자연과 함께 하는 수많은 곤충들을 우리의 편의를 위해 죽게 하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인 건지.. 마음이 무거웠다. 어떻게 하는 게 나와 나를 둘러싼 자연, 서로에게 좀 더 나은 일인지 고민되었다.
내가 찾은 방법은 모기를 유충 때부터 없애는 알약을 정화조, 하수구, 웅덩이 등에 주기적으로 넣어 모기의 개체수를 확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방역은 아주 최소한만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나비를 보면 그때 그 나비의 찢어진 날갯짓이 떠오르고 사슴벌레를 보면 뒤집어있던 그 사슴벌레가 떠오른다. 그들의 모습은 다시 처연함과 애잔함으로 모습을 바꿔 아림이란 물결로 나의 마음을 스친다.
나에게 아무 의미 없던 작은 생명들에게 나는 감정을 이입하고, 소중히 생각하고, 아파하기도 한다. 어쩌면 시골살이와 함께 시작된 가장 큰 변화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
시골에서 살면서 그 작은 존재들로 인해 불편함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로 인해 나는 생명의 고귀함을 느낀다. 자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후손에게 물려줄 이 땅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