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에는 온통 뽀로로, 루피, 타요 각종 어린이 스티커로 도배되어 있고, 뚜껑은 이미 사라져 있어 먼지가 쌓이기 일쑤에 건반에는 무지갯빛 도레미파솔라시도 스티커가 붙어있다.
아이들의 험하고 거친 손놀림에도 아직 작동되는 것이 신기한, 우리 집 거실 한켠 자리를 조용히 지키고 있는, 12년을 나와 동고동락한 존재.
바로 나의 디지털피아노다.
초등학교 시절 바로 옆집에 사촌동생이 살았다. 그 시절 동생집에는 그 당시 귀했던 맑고 고운 소리의 영창 피아노가 있었고 동생이 피아노 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나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고, 피아노로 연주하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한가득이었다.
그 시절, 학원을 다닐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피아노는 너무나 배우고 싶었기에 엄마를 졸라서 피아노 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집에서 걸어 5분 거리의 피아노 학원. 피아노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다. 악보를 보는 방법, 오른손의 자리, 왼손의 자리를 알아가고 그 둘이 만들어내는 화음이 신기했고 그런 연주들이 내 손에서 나오는 게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어린 시절, 열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나는 피아노에 그렇게 푹 빠져들었다. 재미있어하는 만큼 실력은 쑥쑥 늘었고 진도도 굉장히 빨랐다. 선생님도 나도 흐뭇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피아노 학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가지던 어느 날, 엄마가 말씀하셨다.
“옥랑아 피아노 학원 안 다니면 안 되겠니?”
알고 보니 학원비가 2~3달 밀린 상태였다.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내 학원비를 받지 않을 테니 계속 보내라고 하셨다 했지만, 엄마는 더 이상 나를 학원에 보내지 않으셨다.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하는 아픔, 슬픔.
어린 나는 그렇게 인생을 알아갔던 것 같다.
인생에는 기쁨보다는 슬픔을,
가지는 법보다는 참는 법을,
재미보다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빨리 깨달았다.
몇 달 뒤, 엄마는 밀린 학원비를 갚으셨고
어린 내 시절, 큰 기쁨과 행복을 줬던 피아노와는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
주말부부였던 나는 첫째를 임신 후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남편이 있던 광주로 갔다.
연고가 없는 곳이라 아는 사람 하나 없어서 취미 생활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임신 중이라 태교를 한다는 이유로, 디지털 피아노를 구입했다. 좋아하는 노래 악보를 구입해서 치는 피아노는 어릴 때의 그런 큰 열정과 기쁨은 아니지만 내게 작은 즐거움을 주었다.
큰아이에 이어 쌍둥이들이 태어나고 육아로, 일로, 너무 바쁜 삶이었기에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일이 없었다. 양양으로 귀촌을 할 때도 피아노를 가지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다가 쌍둥이들이 좀 크면 치겠지… 라는 생각으로 함께 온 나의 낡은 디지털피아노.
그 낡은 피아노를, 나는 지금 서서히 다시 가까이하고 있다.
시골에서 나는 굉장히 젊은 편에 속한다.
20,30대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에 어디를 가든 40대인 내가 가장 어린 편이다.다니는 성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젊은 사람이 없기에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이유로 한 달에 한번 공소 미사 반주를 하게 됐고
미사 반주를 하는 날이면 나는 낡은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한다.
미숙한 실력이지만 이 조차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에 ‘피아노를 조금 더 잘 치면 좋겠다.’ ‘코드를 볼 줄 알면 더 좋을 텐데..’라는 마음으로 이어졌고, 시간이 날 때면 조금씩 피아노를 마주하고 있다. 어릴 적 내 삶에 열정과 즐거움으로 함께 했던 피아노는 성인이 된 지금, 작은 기쁨과 소망으로 함께 하고 있다.
양양에서의 내 삶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을 참 좋아했었는데 그랬었다는 사실조차 정말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